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미국 외교 사령탑으로는 5년 만에 중국을 방문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만나 “중·미 양국이 올바르게 공존할 수 있느냐에 인류의 미래와 운명이 걸려 있다”며 “미국과 충돌하고 대립하는 것을 원치 않고, 평화 공존과 우호 협력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각자의 성공은 서로에게 위협이 아니라 기회”라며 “중국은 미국의 이익을 존중하며, 미국에 도전하거나 미국을 대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말은 시진핑이 2013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제창했던 외교 구상인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새로운 미·중 관계)’의 핵심 주장 중 일부이다. 중국이 미국의 기존 패권을 넘보지 않을 테니 미국도 신흥 패권국 중국의 지위를 인정해 사실상 양극 체제를 수용해 달라는 맥락에서 나온 표현이다.
시진핑은 이날 발언을 통해 양국 관계가 더욱 경색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메시지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에 전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미·중 갈등이 당분간 양국 정부의 관리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날 시진핑은 긴 테이블을 양쪽에 놓고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듯 회동을 진행했다. 두 테이블에는 각각 블링컨 일행과 친강 외교부장 등 중국 인사들이 앉아 있었고, 시진핑과 블링컨을 제외한 이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런 구도는 지난 16일 시진핑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와 만났을 때, 2018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만났을 때 탁자를 두고 앉았던 것과 확연히 차이가 있다. 미국과 관계 악화는 원하지 않지만, 양국 관계의 주도권은 중국이 쥐겠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로 풀이된다.
두 사람은 이날 북한 핵 문제에 관해서도 대화를 나눴다. 블링컨은 회동 뒤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국제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시 주석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블링컨은 또 “미국은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으며, ‘하나의 중국’ 원칙이 미국의 기본 입장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고도 말했다.
앞서 미·중 정상은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G20(20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첫 회담을 갖고, 기후변화·국제경제·식량안보 등의 현안 해결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 합의의 구체적 이행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블링컨이 지난 2월 베이징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중국 정찰풍선의 미 상공 진입 사태로 양국 관계가 경색되면서 취소됐었다.
이날 회동에서 블링컨은 시진핑에게 최근 중국이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을 제재한 것과 신장위구르·티베트·홍콩의 인권침해 상황을 언급하고 이에 대해 우려를 제기했다고 미 국무부는 밝혔다.
시진핑과의 회동으로 마무리된 블링컨의 1박 2일 방중 기간 미·중은 각 분야에서 기존 입장 차를 확인하며 팽팽한 기싸움을 벌였다. 앞서 이날 오전 블링컨은 중국 외교정책을 지휘하는 왕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을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만났다. 왕이는 블링컨에게 “중·미가 대화할 것인지 대항할 것인지, 협력할 것인지 충돌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중미 관계는 중대고비[關鍵節點]를 맞고 있다”면서 “역사에서 후진을 해봐야 출로(出路)가 없고, 뒤엎고 다시 시작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양국 관계는 저점에 빠졌고, 근본 원인은 미국의 잘못된 대중 인식이 그릇된 대중 정책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만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국은 조금도 물러서거나 타협할 여지를 남길 수 없다”고 했다.
블링컨은 전날인 18일에는 친강 중국 외교부장과 만나 7시간 30분 동안 마라톤 협의를 했지만 역시 돌파구라고 볼 만한 성과는 없었다. 친강은 “현재 중·미 관계는 수교 이래 최저점에 이르렀다”며 양국 관계를 정상 궤도로 되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블링컨은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세상을 위한 비전을 진전시키기 위해 동맹과 파트너와 협력할 것”이라고 맞섰다.
왕이와 친강이 블링컨과의 만남에서 양국 관계의 해법으로 내세운 게 바로 ‘시진핑표 외교 구상’인 신형대국관계다. 왕이는 “미국은 ‘국가가 강해지면 반드시 패권을 추구한다’는 프레임워크로 중국을 바라보지 말라”고 했다. 친강도 “중국의 대미 정책은 상호존중, 평화공존, 협력호혜 원칙을 따른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를 동등하게 대하며 ‘핵심적 이익’을 건드리지 말자는 신형대국관계의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이번 방중을 통해 양국 관계를 개선시킬 획기적인 발표나 합의는 나오지 않았지만, 미·중 관계가 최악을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양국 관계가 중국이 ‘최저점’이라고 표현한 불화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과 중국은 블링컨의 방중을 통해 고위급 소통 복원과 양국 관계 파국을 막아줄 가드레일(안전장치)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양국 학생·학자·기업인의 상호 교류를 장려하기로 했다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국무부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양측은) 미·중을 오가는 항공편 수를 늘리는 데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미·중 정상회담도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WSJ는 “중국 관리들에게 올해 최우선 과제는 시진핑 주석이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해 바이든 대통령과도 별도의 회담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 일각에서는 블링컨의 방중을 계기로 중국의 페이스에 말려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트럼프 시절 백악관에서 근무했던 허버트 맥매스터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중국 정부는 ‘블링컨 장관의 방문은 중국 공산당에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주길 희망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