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2시, 대만 타이베이 중정(中正)기념당의 장제스 청동 좌상 앞에서 위병 교대식이 열렸다. 정시마다 5분가량 진행되는 이 의식을 보기 위해 해외 관광객 100여 명 외에도 수십 명의 현지 시민들이 몰려왔다. 타이베이 토박이인 시민 리모(35)씨는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장면이라 많이 봐둬야 한다”고 했다.
중정기념당은 1980년 대만 총통 장징궈가 아버지 장제스(본명 중정) 초대 총통(1950~1975년)을 기리며 세운 곳이다. 그런데 내년 1월 대만 총통 선거가 다가오면서 위병 교대식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만 내에서 커지고 있다.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과 싸우다 대만으로 쫓겨난 인물이다. 하지만 대만 독립을 주장하며 ‘두 개의 중국’ 입장을 견지하는 여당 민진당은 본토 수복을 포기하지 않으며 ‘하나의 중국’을 천명했던 장제스를 ‘친중’의 상징이라고 보는 것이다.
총통 선거를 6개월 앞둔 대만에선 ‘중국 본토’를 보는 시각을 놓고 민심이 반으로 갈라져 있다. 대만이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녹색 진영(민진당)’ 지지자들과 양안(중국 본토와 대만) 관계 안정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청색 진영(국민당)’의 반목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다. 21일 타이베이 멍자야시장에서 만난 한 시민은 “이제 대만에서는 사상 검증이 일상화됐다”면서 “대만인 정체성을 확실히 하라며 민난어(대만 원주민 방언) 구사로 시험하는 이들까지 생겼다”고 했다.
총통 후보들은 이념 전쟁을 더 부추기고 있다. 반중(反中) 성향의 집권당인 민진당의 총통 후보 라이칭더 부총통은 ‘실속 있는[務實] 대만 독립 일꾼’이라는 노골적 반중 구호를 내걸고 있다. 그는 후보 수락 연설 때 “대만은 세계 민주주의의 최우수선수(MVP)”라며 중국 본토와 맞설 뜻을 분명히 했다. 반면 중국 본토에 우호적인 국민당이 후보로 내세운 허우유이는 지난 19일 국립대만대에서 열린 학생 좌담회에서 “중화민국(대만) 헌법에는 대만 독립이라는 단어가 없다”면서 대만 독립 반대 입장을 확실히 했다. 대만 정치권 관계자는 “대만에서 국민당은 (본토인 탄압한 2.28 사건 등) 과거에 대한 반성과 쇄신을 게을리했고, 민진당은 지난 7년 동안 보복과 역사 청산에 집중했다”고 했다.
올해 대선 레이스의 최대 화두는 ‘평화인가, 전쟁인가’이다. 그런데 양당 모두 자신들이 ‘평화의 수호자’라고 주장한다. 국민당은 ‘민진당에 투표하면 청년들은 전장에 나간다’는 구호를 내놓았다. 민진당이 양안 관계 관리에 실패해 전쟁을 피하지 못할 것이란 주장이다. 대만 병역제도는 2018년 모병제로 전환하면서 청년들이 4개월 군사훈련으로 군 복무를 대체해 왔다. 그러나 전쟁 위험이 커지면서 내년부터 12개월 징병제로 전환될 예정이다.
대만에서 이념 갈등에 질린 대만인들이 양대 정당을 떠나 중도 성향 제3지대 정당으로 떠나는 현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제2 야당인 민중당의 커원저 후보는 최근 대만 여론조사에서 1위에 오르고 있다. “대만이 미·중 대결 국면에서 균형을 취해야 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의사 출신 정치인인 그는 2014~2022년 수도인 타이베이 시장을 지냈고, 지난 2019년 총통 후보 지지율 1위를 기록하자 민중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대만의 한 시민은 “대만 사람들은 이제 전쟁보다 이념 갈등이 더 진절머리 난다고 한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대만이 이념으로 갈라진 것은 그만큼 자유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1일 밤 대만 타이베이 국부 기념관 앞에선 춤판이 벌어졌다. 청년들은 공간이 넓은 이곳에서 매일 밤 국부 쑨원 동상을 마주 보고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베이징의 천안문 성루의 마오쩌둥 초상화 앞이 수시로 통제되고 신분증을 확인하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민주주의 대만과 공산주의 중국 본토 간 자유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대만해협의 정치·경제·군사 정세에 중대한 변화가 있으리란 전망도 나온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미·중 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타이베이의 한 시민은 “화약고인 대만의 미래가 이번 선거에 달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