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간첩 행위의 범위를 넓히고 처벌을 강화한 ‘반(反)간첩법(방첩법)’ 개정안을 다음 달 1일 시행한다. ‘간첩 행위’의 정의를 모호하게 하고, 조사·처벌 권한은 확대했다. 중국 당국이 자의로 법을 집행할 여지가 커졌다는 뜻이다. 앞으로 중국이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한·중 갈등 상황에 재중 교민, 한인 학자·기자나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을 반간첩법으로 압박할 가능성도 커졌다. 중국 법조계 관계자는 “안 그래도 모호한 반간첩법을 더 모호하게 바꿨다”면서 “이 법으로 중국에 대한 정보가 대거 차단되며 새로운 ‘죽(竹)의 장막’이 들어설 수 있다”고 했다.
2014년 이후 9년 만에 개정한 법안은 종전 5장(章) 40조항에서 6장 71조항으로 늘었다. 핵심은 간첩 행위 적용 대상을 ‘국가 기밀·정보를 빼돌리는 행위’에서 ‘국가 안보·이익과 관련된 자료 제공’ ‘간첩 조직에 의지[投靠]하는 행위’ 등으로 크게 확대한 것이다. ‘국가 안보와 이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고 기밀이 아닌 정보도 포함되기 때문에 중국 당국이 간첩 행위를 멋대로 판단할 수 있다. 예컨대 중국 반도체 산업 분석 데이터, 시진핑 국가주석에 대한 비판성 글을 외국에 보내도 간첩으로 지목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간첩 조직에 참여하거나 임무를 부여받지 않았더라도, 이와 연루돼 이익을 얻었다면 간첩으로 간주한다.
조사·처벌은 대폭 강화됐다. 개정안에서는 ‘시(市)급 이상 안전 기구’의 허가만 받으면 혐의자의 정보·물품을 열람·수거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또 물증이 없어 간첩죄를 입증하지 못해도, 정황만으로 벌금 5만위안(약 900만원)을 부과한다는 조항이 새로 생겼다.
강화된 중국의 반간첩법은 현지 거주자뿐 아니라 중국 여행객에게도 적용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법 규정이 모호하기 때문에 주요 국가 기관, 군사 시설이나 시위 장면 등을 촬영했다가 ‘간첩 행위’로 몰릴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28일 오전 베이징시 둥청구(區)의 고층 빌딩 23층에 있는 중국 컨설팅사 캡비전(凱盛融英)의 베이징 지사는 외부인의 출입을 삼엄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이날 회사 직원은 “언론은 응대하지 않는다”면서 “그런 이야기(반간첩법)를 하는 것 자체가 불편한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달 중국 국영 CCTV는 이 회사가 외국 정부·군(軍)·정보기관과 관계가 밀접한 해외 업체들에서 컨설팅 프로젝트를 대거 수주했고, 중국의 핵심 산업 정보 등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고 보도했다.
반간첩법 시행을 앞두고 중국에선 ‘정보’를 취급하는 모든 이가 긴장하는 상황이다. 최근 서울에서 중국에 온 한 북한 학자는 “북중 접경 도시인 단둥 방문을 포기했다”고 했다. 반간첩법 시행 초기에 ‘시범 처벌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주변에서 말려 일정을 전면 수정했다. 서구권 매체의 주(駐)베이징 기자는 “일단 동향을 보고 취재 계획을 세우려고 한다”며 한 달간 휴가를 내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에 지사를 둔 글로벌 싱크탱크와 컨설팅 회사들은 지침 마련에 나섰다. 베이징의 한 미국 싱크탱크 관계자는 28일 ″내부에서 ‘당분간 중국 고위 관료들과 직접 접촉하지 말라’는 지침이 나왔다”고 했다. 고위급 인사를 만나는 일 자체가 반간첩법에서 금지하는 ‘정보 획득 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맥킨지차이나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선제적으로 중국 정부·국영기업[體制內]과 연관된 프로젝트를 대부분 중단했다.
축적된 처벌 사례가 없기 때문에 외교관들도 명확한 지침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당분간 조심하라”는 당부만 전하고 있다. 주중 한국 대사관은 26일 홈페이지에 올린 ‘반간첩법 개정안 시행 대비 안전 공지’에서 “우리나라와는 제도·개념 등의 차이로 예상치 못한 피해가 생길 수 있다”며 “중국에 체류하고 있거나 방문 예정인 국민들은 유의해 달라”고 했다.
중국이 이 법안을 앞으로 대외 보복 수단으로 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18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멍완저우 당시 화웨이 부회장이 체포되자 중국은 전직 외교관인 마이클 코브릭을 곧바로 간첩죄로 체포했다. 일종의 기업 컨설턴트로 알려진 코브릭은 미·중 관계 악화 후 간첩으로 몰렸고, 2021년 멍완저우가 석방되고 나서야 풀려났다. 반간첩법 강화로 중국에서 활동하는 기업인이나 기자, 학자가 이런 식으로 한중 관계 악화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은 더 커졌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한 대기업 중국 법인은 최근 현지 직원들에게 “중국 관련 동향, 정보 등을 카카오톡·텔레그램을 통해 돌리지 말고, 이미 열람한 내용은 삭제하길 권고한다”는 내용의 지침을 내렸다. ‘군사 지역, 항만 등 공공 시설은 촬영하지 말라’ ‘GPS 켜고 등산하지 말라’ ‘기독교인 모임을 하지 말라’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대기업 관계자는 “많은 기업이 중국 현지 법무 법인을 섭외해 법이 무엇을 금지하고 어떻게 처벌하는지 자문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의 베이징 법인 직원은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휴대전화와 노트북에서 중국 산업 시설, 장비와 관련된 사진이 있는지 확인해 삭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반간첩법 개정안이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외부’가 아닌 ‘내부’란 분석도 나온다. 중국의 고위직과 화교들을 겨냥한 법안이라는 것이다. 한 외국계 컨설팅 회사 관계자는 “앞으로 공산당 정점에서 중국 정보의 모든 창구를 관리하겠다는 선언”이라면서 “이제 중국을 제대로 알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