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外大 나와 오직 실력으로 - 왕이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이 25일 외교부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2012년 시작된 시진핑 주석 체제 이후 처음으로 공산당 정치국 위원과 부장 자리를 동시에 맡는 인사로 기록됐다. 시진핑 주석이 왕이를 외교정책 보좌관으로 가장 신뢰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진은 지난해 7월 인도네시아 발리 누사두아에서 열린 G20(20국) 외교장관 회의에서 발언하는 장면이다. /EPA 연합뉴스

“굉장한 애국적 국수주의자로 윗사람 지시가 없어도 신념에 따라 알아서 움직인다. 한번 본 사람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친화력은 독보적이다.”

한 달 동안 나타나지 않아 의문을 자아냈다가 25일 결국 해임된 친강 전 외교부장(장관) 후임으로 임명된 왕이(王毅)의 경쟁력에 대해 한국의 한 중국 소식통은 이렇게 평가했다. 2013년부터 친강에게 자리를 물려준 지난해 말까지 외교부장을 지낸 왕이는 이후 공산당 정치국 위원으로 당 차원의 외교 정책을 지휘해 왔다. 앞으로는 한동안 외교부장과 정치국 위원을 겸임하며 당정의 외교 사령탑을 맡는다.

왕이는 69세였던 지난해 ‘칠상팔하(지도부 교체 때 67세는 남고 68세는 퇴임)’라는 관례를 깨고 정치국 위원으로 파격 승진했다. 미국과의 대립, 동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재정립,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의 역할 확대 등 외교 현안이 산적한 중국 지도부가 외교부장 경질이라는 초유의 혼돈 가운데 다시 왕이를 외교부장으로 선택하면서 왕이의 경쟁력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번 외교부장 재임명이 친강 경질로 인한 혼란 수습용이자 과도기적이라 해도 매우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많기 때문이다.

왕이를 경험한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왕이의 생존 비결은 빠른 판단력과 거침없는 추진력이다. 외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책략에 가까운 전략을 짜서 일을 밀어붙인다고 한다. 외교부 부부장(차관)으로 일하던 2002년 북핵 관련 북·중·미 3자 회담 당시의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미국과 양자 회담을 원하는 북한, 중국 없이는 안 하겠다는 미국이 대립하는 가운데 왕이는 3국이 모이는 연회를 열었다. 왕이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사이 중국 당국자들이 하나둘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미국은 결국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 북한과 양자회담을 하게 됐다. 후나바시 요이치 전 아사히신문 주필은 책 ‘조선반도 제2차 핵위기’에 “왕이가 얼마나 치밀하고 유연한 사고를 하는 인물인지를 보여준다”고 썼다.

왕이와 교류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친화력을 그의 독보적 능력으로 꼽는다. 한 중국 소식통의 말이다. “왕이는 외교가에서 한번 만나면 이름을 다 기억하는 인물로 유명하다. 미국과 ‘파워 게임’을 벌이는 동시에 범(汎)글로벌 외교를 추진하려 하는 중국 입장에선 왕이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 오랜 외교관 생활로 국가원수들도 다 알고 네트워크도 촘촘하다.” 지난해 한국의 박진 외교장관과 중국 칭다오에서 만났을 때도 왕이는 기자들에게 “안녕하십니까. 한식 좋아요”라고 한국어로 농담을 하고 박 장관에겐 “짜장면을 먹으러 (한국에) 가겠다”면서 유화적으로 분위기를 풀어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철저한 자기 관리도 ‘불사조 왕이’의 무기로 꼽힌다. 2000년대 중반 외교부 부부장 시절 암 투병을 했다고 알려진 그는 완치 후 각별한 건강관리를 통해 체력을 관리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201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G20(20국) 외교 정상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새벽 6시쯤 60대 중반인 왕이가 수행원들과 조깅하는 모습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외교부 등산협회 명예회장을 맡을 정도로 등산에도 열심이라고 한다.

왕이와 베이징 제2외국어대 일본어학과를 함께 다녔다는 한 인사는 미국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에 “왕이는 절대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친구였다. 다른 학생이 일본어만 파고 있을 때 왕이는 시간을 쪼개 일본의 문학과 역사까지 섭렵했다”고 했다.

평생을 외교관만으로 일해온 왕이의 경력은 ‘튀는 인사’를 꺼리는 중국 지도부의 눈밖에 날 가능성을 더욱 크게 줄여줬다. 통상 중국 내각엔 지방정부 수장이나 당서기를 지낸 정치인 출신이 득세해 왔다. 하지만 왕이는 외교만 했기에 지역적 기반이 없다. 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지도부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각에선 왕이가 ‘컴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결국 시진핑과의 ‘코드 맞추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친화력·유연함 등 외교적 장치로 포장했지만 왕이의 본질은 결국 중국 중심 패권주의를 지향하는 시진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패권적 국가주의 신념과 거침없는 추진력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때때로 거만하고 고압적인 태도가 불거져 나오는 것은 왕이의 단점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지도자들이 지시하기 전에 확신을 갖고 선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왕이의 강점이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종종 ‘오버액션’을 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7년 중국을 방문했을 땐 왕이가 친구에게 하듯 어깨를 ‘툭’ 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외교 결례 논란이 일었다. 앞서 2016년엔 중국의 인권 탄압 문제를 묻는 캐나다 기자에게 “어디서 그런 오만이 온 것이냐. 당신이 중국을 아느냐. 중국에 가 봤느냐”라고 윽박질러 논란이 됐다. 당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직접 유감을 표명하는 등 비난이 일었다.

왕이의 승승장구가 중국 외교가의 유력 인사인 장인 덕분이라는 평가도 있다. 왕이의 장인 첸자둥(錢嘉東)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중국 총리의 총애를 받아 비서를 지냈고 후일 스위스 제네바 유엔사무소 대표로 일한 외교계 원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