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궈타이밍, 2024 대선에 출마하겠습니다. 대만이 벼랑 끝에 놓였습니다”
28일 오전 10시 대만 총통부(총통 집무실)를 마주 보는 건물. ‘대만의 트럼프’로 불리는 궈타이밍(郭台銘·73) 폭스콘 창업자가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트레이드 마크인 대만 국기가 새겨진 파란색 모자를 쓰고 나온 그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지지자들을 향해 인사했다. 성조기 모자를 즐겨 쓰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떠올리게 했다.
트럼프와 닮은 점이 많은 그는 대만 최고 부호이고, 2019년 대권에 도전했다가 불출마 선언을 하는 등 이례적인 정치 행보를 이어왔다. 이날 그의 대권 도전 선언 또한 파격적이다. 지난 5월 17일 친중 성향 국민당의 총통 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지 3개월여 만에 무소속으로 출마 선언하며 국민당에 도전한 격이기 때문이다. 국민당 원로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까지 나서서 궈타이밍에게 국민당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촉구했지만, 궈타이밍은 거부했다. 대만의 총통 선거는 내년 1월 13일 치러지며, 당선자는 내년 5월 20일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뒤를 이어 대만을 이끌게 된다.
궈타이밍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긴장이 높아지는 대만해협과 미·중 관계를 언급하며 “대만이 절대로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4년이라는 시간을 허락해 주면 대만에 50년의 평화를 가져다주겠다”고 공언했다. 또 “주류 민의를 대표해 국민당, 민중당 등 야권을 통합하겠다. 야권 통합을 해야 승리할 수 있다”면서 “민의는 당의 뜻보다 크고, 공익은 영원히 사익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그의 기자회견은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생중계됐다.
궈타이밍의 출마로 친중표가 갈리면서 반중 성향 집권 민진당의 총통 선거 승리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궈타이밍은 애플 아이폰 조립으로 유명한 대만 폭스콘의 창업주이자 대만 최고 갑부다. 폭스콘 수익의 70% 이상이 중국 본토 공장에서 발생하고 중국 지도부와도 핫라인이 있어 친중 인사로 분류된다. 1970년 국민당에 입당한 그는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 10여 년 동안 대만에서 가장 유력한 총통 후보로 거론돼왔다.
특히 지금은 허우유이(侯友宜) 국민당 총통 후보가 고전 끝에 지지율 2위로 올라선 시점이라 궈타이밍의 출마가 국민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껏 대만 대선판은 선두를 달리는 민진당의 라이칭더(賴淸德) 부총통과 국민당의 허우유이 신베이시 시장, 제2야당 민중당의 커원저(柯文哲) 주석의 3파전 양상이었다. 허우유이는 줄곧 3위에 머물다가 이달 들어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번 출마 회견에서 궈타이밍은 “야권 통합만이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며 허우유이, 커원저 민중당 후보와의 단일화 여지를 남겼다. 일각에서는 궈타이밍의 가세로 라이칭더에게 쏠려 있는 유권자들의 시선이 오히려 야권으로 옮겨가며 판세가 바뀔 수 있다고 분석한다. 한 여론조사 기관이 지난 17∼21일 궈타이밍을 추가해 실시한 총통 후보 여론조사에서 당시엔 출마자도 아니었던 궈타이밍의 지지율이 12.4%로 나왔다. 허우유이(16.2%)와 비교해도 존재감이 상당하다.
궈타이밍의 이번 대권 도전이 2019년의 데자뷔란 지적도 있다. 당시 궈타이밍은 총통 선거에 도전하기 위해 폭스콘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 국민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당내 총통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이후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가 총통 후보 등록을 하루 앞둔 밤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궈타이밍의 불출마 선언은 친중 성향 국민당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중국의 관여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결국 친중 세력은 패배했다.
한편 대만 대선판이 반중인 민진당에 유리하게 흘러가자 중국은 국민당 인사들을 챙기며 힘을 실어주고 있다. 국민당 소속으로 장제스의 증손인 장완안(蔣萬安) 타이베이 시장은 한 포럼 행사 참석을 위해 29일 중국 상하이를 방문한다. 중국 당국은 지난 4월 마잉주 전 총통의 방문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대접할 것으로 전해졌다. 중화권 매체들은 “상하이에서 장완안을 융숭히 대접해 대만 내 중국 친화적인 분위기 조성을 노리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