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때문에 중국에선 고성능 AI 칩이 씨가 말랐습니다. 암시장도 소용없어요.”
5일 오후 중국 IT 굴기의 상징인 선전 화창베이(華强北)의 ‘사이거 전자 상가’ 3층. 반도체 칩 매장을 운영하는 30대 장모씨는 엔비디아 A100·H100 같은 고성능 그래픽 처리 장치(GPU)를 찾는 기자에게 이같이 말했다. 이날 화창베이 4곳의 전자 상가를 돌아봤지만, ‘신화창 전자 상가’의 매장 한 곳에서만 “싼좡(散裝·컴퓨터에 붙어 있는 부품을 분리한 것) A100을 공수할 수 있다”는 답을 얻었다. 이마저도 가격이 미국 판매가 1만달러(약 1335만원)의 약 두 배인 13만위안(약 2370만원)이고, 사흘을 기다려야 했다. 엔비디아가 미국 제재를 우회하려고 사양을 낮춰 내놓은 GPU A800·H800 등도 시중에서 웃돈을 줘야 살 수 있는 상황이다.
미·중 AI 전쟁이 고성능 GPU 확보전으로 번지면서 중국은 GPU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GPU는 AI 연산에 최적화된 반도체 칩으로, 챗GPT 등 AI 서비스가 본격화하면서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미국은 작년 9월 고성능 AI 개발의 필수품인 고사양 칩의 대중국 수출을 차단했다. 지난달에는 미국 자본이 중국의 AI 분야 투자를 규제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AI용 GPU의 92%는 미 엔비디아가 점유하고 있다.
중국 테크 업계에서는 자금력이 풍부하고 중국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업체들보다는 중소 테크 기업과 스타트업들이 GPU 부족 현상의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본다. 중국 빅테크들은 미국의 제재에 대응해 작년 하반기부터 ‘칩 사재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바이두, 바이트댄스, 텐센트, 알리바바 등 중국 주요 테크 기업들은 50억달러어치의 엔비디아 GPU를 주문했다. 반면 첨단 부품을 조달하지 못한 스타트업들은 연구·개발에 차질을 빚고 있다. 상하이의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이제 중국에서 AI스타트업은 더 이상 경쟁력을 키우기 어려워졌다”고 했다.
‘중국 최대 전자 상가’인 화창베이의 위상도 낮아지고 있다. 선전시 푸톈구에 있는 145만㎡(약 43만9000평) 크기의 전자 상가 밀집 구역인 이곳은 한때 제품 설계도만 들고 가면 모든 부품을 사서 완제품을 만들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1층 점포 임대’ 광고가 곳곳에 붙어 있다.
테크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 빅테크들은 당장 미국 수준의 AI 연구와 제품 개발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며 “다만 장기적인 성공은 자국 내에서 AI 칩을 생산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