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러시아 정상회담과 관련해 중국은 양국의 밀착 국면이 자국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하며 경계하는 분위기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만남 소식을 거의 보도하지 않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13일 북·러 정상회담에 대해 “북한과 러시아 사이의 일이고, 북·러 관계에만 영향을 준다”면서 선을 그었다. 북·러 협력 강화로 북·중·러 진영이 굳어질 경우 우크라이나전 이후 서방과 완전히 등을 돌린 러시아, 핵 개발로 겹겹의 제재를 받는 북한 등 ‘국제 왕따(international outcasts, 워싱턴포스트)’와 ‘한배’를 타게 될까 봐 경계하는 것이다. 이 경우 중국과 서방권 전체의 대립 구도가 고착화되고, 미·중 경쟁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중국이 북·러 정상회담을 두고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 가운데 한국 정부는 이를 한·중·일 정상회의 타진 등 중국과의 관계 개선 계기로 삼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중국 국영 CCTV와 당 기관지 인민일보 등은 김정은의 방러 소식을 외면하다시피 하고 있다. CCTV의 메인 뉴스인 ‘신원롄보’는 지난 10~11일 김정은의 방러 계획을 전하지 않다가 12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을 인용해 단신으로 다뤘다. 13일에는 뉴스 말미에 35초를 할애해 푸틴과 김정은이 북한 정권 수립 및 북·러 수교 75주년을 맞아 만났고, 로켓 ‘안가라’ 조립·시험동 등을 둘러봤다고 전했다. 인민일보 11~13일 자 지면엔 김정은 방러 소식이 아예 없었다. 국영 통신사인 신화통신도 외신 인용으로 소식을 전할 뿐 북·러에 대한 논평은 내놓지 않았다.
중국 입장에서 북·러 급속 밀착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중국은 그동안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한·미·일 등에 대한 ‘협상 카드’로 써왔는데, 러시아와 북한이 밀착할 경우 영향력이 약화된다. 우크라이나전 장기화를 우려해 중국이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에 소극적이라는 분석이 있었는데, 북·러 밀착이 강화되면 중국이 북한과 함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만약 한·미·일 동맹이 강화되는 동시에 북·중·러 진영이 고착화되면 중국이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온 프랑스·독일 등 유럽 국가들의 반발을 피하기 어렵고, 미·중 경쟁에서 중국이 더 수세에 처할 가능성이 커진다. 우크라이나전에서 고전하는 러시아, 장기 코로나 봉쇄로 경제가 파탄 난 북한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짐도 안게 된다.
일부 중국 매체는 북·러 밀착의 책임을 한국에 돌리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중국 관영 영자지인 글로벌타임스는 12일 김정은 방러에 대해 리하이둥 중국 외교 학원 교수를 인용해 “북·러의 긴밀한 협력은 잦은 한미 군사훈련의 결과”라며 “한미 군사훈련은 동북아에서 더 많은 분열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중국 동남위성TV엔 중국 국제문제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출연해 “러시아가 김정은 방러를 통해 한국 측에 ‘미국 따라서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왕이 외교부장(장관)은 오는 18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담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앞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북·러 정상회담 직전인 지난 6일, 중·러 국경 지역이자 최북단인 헤이룽장성 모허시 베이지(北極)촌을 의도적으로 시찰했다. 김정은이 러시아에서 평양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중국을 경유할 가능성도 주목된다.
한편 윤석열 정부는 북·러 밀착 국면을 중국과의 관계 개선 계기로 삼을 방법을 찾고 있다. 윤 대통령은 12일 국무회의에서 “한국은 의장국으로서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2019년 이후 중단된 한·중·일 정상회의를 연내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3국이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한·미·일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등 미·일과의 협력엔 속도를 낸 반면, 중국 시진핑 국가 주석과는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G20(20국) 정상회의에서 첫 정상회담을 한 이후 중국 최고위급 인사와 최근까지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지난주 인도네시아·인도 순방을 계기로 중국 리창 총리와 수차례 회담·환담 형식으로 만나면서 한중 관계와 관련해 진전된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윤 대통령은 7일 인도네시아에서 리 총리와 회담하면서 “한중 관계는 빈번하게 만나 교류하고 대화해가면서 풀어갈 수 있다”고 했다. 10일 인도 뉴델리의 간디 추모 공원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헌화 행사에서도 옆자리에 앉은 리 총리에게 “연내에 리 총리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시진핑 주석에게도 각별한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순방 때까지만 해도 ‘한·일·중’이라는 표현을 쓰던 윤 대통령은 12일 국무회의에서 다시 ‘한·중·일’이라고 했다.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11일 방송 인터뷰에서 시 주석의 방한(訪韓)에 대해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다”며 “중국이 우리와 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의사가 분명하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오는 23일 개막하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개최국인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덕수 국무총리를 참석시키는 방안도 적극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안게임에 장관급이 아닌 총리가 참석하는 것은 이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