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러 정상회담 이후 중국이 숨 가쁘게 미국·러시아와 대화에 나서고 있다. 미국을 견제하는 ‘협상 카드’로 써온 북한이 러시아와 밀착하고, 우크라이나전을 치르는 러시아가 중국과 ‘한배’를 타려고 하자 북·러에 끌려가는 상황을 막기 위한 행보로 분석된다.
중국 외교 사령탑인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장관)은 18일(현지 시각) 모스크바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 장관과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영원한 우정”을 언급하면서도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왕이 부장은 “양국 관계는 영원한 우정, 포괄적·전략적 조율, 호혜 협력이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자주(自主) 외교 정책을 추구하며, 양국 협력은 제3자를 겨냥하거나 (다른 국가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는 “중국은 시종일관 평화 회담의 올바른 방향을 견지했다”고만 했다. 러시아가 장기전을 치르는 상황에서 국익을 해치면서까지 도울 수는 없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왕이는 당초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참석할 계획이었지만, 북·러 정상회담 소식이 들리자 러시아로 행선지를 바꿨다. 북·러 밀착으로 러시아의 대북 영향력이 커지면 중국이 미·중 경쟁에서 불리해지고, 북·중·러 진영이 굳어지면 우크라이나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왕이는 이번 방러 기간에 북·러 정상회담에 대한 정보를 공유받고, 다음 달 ‘일대일로 국제 협력 정상 포럼’을 계기로 열릴 가능성이 높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 일정과 의제를 조율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오는 21일까지 러시아에 머물며 제18차 중·러 전략 안보 협의도 참석할 계획이다.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도 관리하고 있다. 왕이는 러시아를 찾기 직전인 지난 16∼17일 지중해 섬나라 몰타에서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과 전격 회동했다. 이틀간 12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동 직후 왕이는 “대만 문제는 미·중 관계의 ‘레드라인(양보할 수 없는 선)’이라고 밝혔다”면서 “미·중 고위급 교류를 유지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한정 중국 국가부주석도 18일 유엔총회 참석을 계기로 뉴욕에서 토니 블링컨 미 국무 장관과 회담했다. 한정은 회담에서 “세계는 안정적이고 건전한 중·미 관계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관계는 양국과 세계에 이롭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중·미 관계의 건전하고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하길 바란다”고 했다. 견제·압박 중심의 대(對)중국 정책을 멈추고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미 국무부는 “(양측은 회담에서) 소통 창구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의 외교·안보 사령탑 간 회동으로 11월 미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 회의에서 양국 정상 간 만남 가능성도 커졌다. 악화 일로였던 미·중 관계는 올해 들어 블링컨 국무 장관, 지나 러몬도 상무 장관 등 고위 인사들이 베이징을 방문하며 진정되는 분위기다. 중국의 이 같은 행보가 북·중·러 진영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을 견제하고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북·러와의 관계 유지가 필수다.
이런 가운데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던 ‘시리아의 학살자’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도 시진핑 국가주석의 초청을 받아 21일 중국을 공식 방문한다. 시리아 대통령실은 19일 성명에서 이같이 밝히며 “알아사드 대통령은 시 주석과 정상회담도 개최한다”고 했다. 시리아는 반(反)정부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는 이유로 22국으로 구성된 아랍 연맹에서 퇴출됐다. 최근 시리아는 중국의 도움으로 국제사회 복귀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 3월 중국 주재로 시리아 동맹국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고, 이를 계기로 시리아는 아랍 연맹에 복귀했다. 아사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2004년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이후 19년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