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 2일 중국 베이징의 주석 관저에서 헨리 키신저(오른쪽) 미국 국무장관이 마오쩌둥과 악수하고 있다. 키신저는 1971년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해 관계 개선의 물꼬를 텄고, 두 나라는 1979년에 정식 수교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미국에서 키신저를 뒤이을 후계자가 나오길 바란다’

관영 환구시보는 1일 이 같은 제목의 사설(社評)에서 “키신저의 별세는 중·미 관계의 큰 손실이고, ‘제2의 키신저’가 나올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百感交集)한다”고 했다. 키신저는 1970년대 냉전기 ‘핑퐁 외교’를 통해 미·중 관계 정상화의 물꼬를 텄고, 마오쩌둥부터 시진핑까지 중국의 모든 최고지도자를 만나며 미·중 소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향후 제2의 키신저가 나오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중국과 막후에서 접촉하며 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조직이나 고위급은 계속해서 존재하겠지만, 키신저처럼 중국 최고위급들과 신뢰를 기반으로 대화하는 미국인이 나오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알프레드 우 싱가포르국립대 리콴유 공공정책학원 부교수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키신저가 1978년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중국이 수십 년 동안 예우했기 때문에 그가 독특한 역할을 갖게 된 것”이라며 “오랜 우정으로 구축된 그의 자리를 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미·중이 이견을 좁히기 어려워지면서 차세대 키신저를 기대하기 더욱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주펑 중국 난징대 국제관계연구원장은 “키신저는 ‘공동의 적’인 소련에 맞서 미·중 양국이 하나로 뭉쳤던 역사적 맥락 속에 등장한 인물”이라고 했다.

홉킨스·난징 중국 미국 연구 센터의 데이비드 아라세 국제정치학 교수는 “그의 별세는 냉전 시대에 미국이 중국의 국제적 고립을 종식시키고 성공적인 현대화를 도왔던 미·중 화해, 우호 협력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미·중 관계에서 양국은 전략적 비전을 공유하지 않게 됐기 때문에 키신저와 같은 인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대만연합보는 키신저가 미·중 관계를 과거의 잣대로 바라본 탓에 오히려 대(對)중국 정책에 오류가 생겼다고 비난했다.

중국의 지도자들과 관영 매체들은 연일 키신저를 추모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3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조전(弔電)에서 “‘키신저’라는 이름은 영원히 중·미 관계와 연결돼 있을 것이고, 키신저 박사는 영원히 중국 인민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고 그리움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중국의 이인자 리창 총리는 키신저 가족에게, 중국 외교 사령탑인 왕이 외교부장은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에게 각각 조전을 보냈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미 양국은 키신저 박사의 전략적인 안목과 정치적인 용기, 외교적인 지혜를 계승해야 한다”고 했다. 환구시보는 “키신저의 인생은 중·미 관계에 남아 있는 귀중한 역사적 유산”이라며 “키신저는 라오펑유(오랜 친구)·하오펑유(좋은 친구)로 불렸는데, 정(情)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중국인에게 이런 칭호는 진심어린 것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