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11월 1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해 응우옌푸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 나란히 걷고 있다. 시진핑은 6년 만인 이달 12일, 이틀 일정으로 베트남을 방문해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 강화에 나선다. /AP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2일 1박 2일 일정의 베트남 국빈 방문을 시작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 베트남을 국빈 방문한 지 석 달 만이다. 과거 미국·중국과 각각 전쟁을 치르며 악연을 쌓은 베트남이 두 나라의 외교 격전장으로 변모하는 모습이다. 시진핑의 베트남 방문은 2015·2017년에 이어 세 번째이고, 올해 외국 방문은 러시아(국빈)·남아프리카공화국(브릭스 정상 회의)·미국(APEC 정상 회의)에 이어 네 번째다.

시진핑은 이날 베트남 서열 1위인 응우옌푸쫑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양국의 전면적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를 심화하는 바탕에서 전략적 의미가 있는 중국·베트남 운명 공동체 구축을 위해 협력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시진핑은 “베트남의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며 인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는 것에 대해 동지이자 형제로서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도 했다. 시진핑은 방문 기간 보반트엉 베트남 국가주석과 팜민찐 총리, 브엉딘후에 국회의장 등 최고 지도부와 잇따라 만난다.

앞서 시진핑은 베트남 노동당 기관지 인민보 기고문에서 “친척집이나 이웃집에 드나드는 것처럼 (베트남이)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시진핑은 방문 기간 베트남 사회 기반 시설 개발에 중국 자본을 대거 투입하는 대규모 프로젝트 등 화끈한 선물 보따리를 풀 예정이다. 정치·안보·경제·민간 분야 협력은 물론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으로 껄끄러운 해상 문제까지 대화 테이블에 오른다.

12일 베트남 하노이 공산당 중앙청사에서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과 응우옌푸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손을 흔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특히 두 나라 관계가 기존 ‘포괄적 전략 동반자’에서 중국이 주창하는 ‘운명 공동체’로 업그레이드될 것인지가 관심이다. 중국 외에 베트남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맺은 나라는 한국·인도·러시아·중국·미국·일본 등 6국뿐인데, 중국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려는 것이다. 다만 베트남이 미국을 의식해 공식 합의문에는 ‘운명공동체’ 부분이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과 베트남은 공산 국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양국 관계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베트남이 소련과 우호 조약을 맺고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중국이 반발해 보복에 나서면서 1979년 전면전으로 맞붙으며 국교가 단절됐고, 12년 뒤인 1991년에야 완전 정상화됐다. 시진핑 집권기인 2014년에는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지역인 파라셀 군도(중국명 시사 군도, 베트남명 호앙사 군도)에 시추선을 설치하자 베트남에서 전례 없는 규모의 반중 시위가 일어나면서 양국 관계가 냉각됐다.

그러나 바이든이 베트남을 찾아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한 뒤 석 달 만에 시진핑도 베트남으로 향하면서, 베트남을 자국 영향권에 두려는 미·중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는 경제·외교·공급망 등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베트남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패권 장악을 위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을 공략하고 있고 핵심 거점으로 삼은 곳이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아세안 10국 중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 이어 셋째로 인구가 많고, 제조업 기반도 탄탄하다. 미국은 지난 6월 베트남 다낭에 로널드 레이건 항공모함을 기항시킬 정도로 베트남과 관계 개선에 힘을 쏟았다.

이런 양국 밀착 관계가 중국을 자극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입장에선 국경을 맞대고 남중국해와 면한 베트남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이 베트남을 완전한 우방으로 끌어안으면 인도·태평양에서 자국의 영향력에 제동이 걸릴 수 있을 것으로 우려해 왔다. 최근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받는 필리핀과 잇따라 충돌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세안 내 자국의 우호 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블룸버그통신은 “시진핑의 방문은 전략적으로 주요 파트너인 베트남이 미국에 너무 가까이 붙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하노이와 중국 남부를 잇는 철도 노선 강화를 위한 보조금을 지원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미·중 외교전의 한가운데 있는 베트남은 최대한 국익을 챙기는 모습이다. 최근 글로벌 기업 상당수의 생산 시설을 자국으로 유치했다. 팜민찐 베트남 총리는 시진핑 방문 이틀 전인 10일 미국의 인공지능 반도체 칩 제조 업체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와 하노이에서 만나 “베트남에 엔비디아 반도체 거점 센터가 설립되길 희망한다”고 했다.

☞운명공동체

시진핑 집권기부터 중국이 자국 중심 역내 질서를 구축하려고 만든 개념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이 군사 분야의 협력만 중시하는 미국보다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과 협력해야 함께 번영할 수 있다는 취지가 담겼다. 시진핑은 2015년 유엔총회 연설에서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강조하며 ‘인류 공동 운명체’라는 단어를 처음 썼다. 이후 주변국과 관계를 강화하면서 국가 대 국가의 교류를 넘어선 차원의 협력이라는 의미로 ‘운명 공동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