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국제금융센터(IFC) 건물이 안개에 가려져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홍콩 금융 중심지 센트럴의 채터로드 프린세스 빌딩 25층에 있는 칵테일 바 ‘세바’는 내년 5월 폐업한다고 최근 공지했다. 16년 동안 홍콩 최고 경관을 자랑하던 이 바는 헤지펀드 투자자 등 전 세계 금융인들의 아지트로 유명했지만, 홍콩 증시 침체로 최근 손님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홍콩의 한 증권사 직원은 중국 경제 매체 차이신에 “거래를 성사시킨 날이면 으레 세바에서 축배를 들었는데, 4년째 이어진 홍콩 증시 하락세가 가게 문을 닫게 만든 것 같아 울적하다”고 했다.

‘아시아 금융 허브’라는 홍콩의 오랜 명성이 흔들리고 있다. “홍콩은 이제 국제 금융 허브 유적지(遺址)”라는 자조도 홍콩 금융인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껍데기만 남은 금융 허브가 됐다는 탄식이다. 1984년 영국과 중국이 체결한 홍콩반환협정 이후 홍콩은 외교·국방을 제외한 분야에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낮은 세율과 최소한의 규제 등 혜택으로 홍콩은 미국 뉴욕, 영국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금융 허브로 떠올랐다. 1992년 미국이 관세와 투자, 비자 발급 등에서 중국 본토와 다른 특별 대우를 해준다는 내용의 홍콩정책법을 제정하면서 홍콩의 위상은 치솟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홍콩과 중국 본토의 경제 관계가 긴밀해지고, 미·중 갈등 속 해외 자본 유출이 빨라지며 홍콩 증시는 전례 없는 침체로 명성에 금이 갔다.

‘홍콩 금융의 대륙화’로 자유로운 금융 중심지라는 홍콩의 매력이 희미해진 가운데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하는 부동산 분야 침체와 금융사의 동반 부실 우려 등으로 홍콩 증시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홍콩 증시를 대표하는 지수 중 하나인 H지수(홍콩항셍중국기업지수·HSCEI)는 올 들어 18% 떨어졌다. H지수는 홍콩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 주식(H주) 가운데 50종을 추려 산출한 지수다. 공상은행과 차이나모바일(이동통신사) 등 중국 국영기업들이 주로 포진했던 이 지수에 2018년 들어 대륙의 민간 회사들이 대거 편입되면서 ‘순도’가 떨어졌다. 부동산 개발 업체 ‘비구이위안’이 대표적이다.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로 이 회사 주가가 폭락하면서 H지수는 직격탄을 맞았다. 지수에 편입된 텐센트·알리바바 등 대륙의 빅테크 기업들도 2021년부터 이어진 중국 정부의 ‘빅테크 때리기’ 규제로 주가가 폭락했다.

홍콩의 최근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한창때의 홍콩을 떠올리며 H지수에 투자한 사람들은 흔들리는 ‘대륙 지수’에 돈을 넣은 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불똥은 한국으로도 튀었다. H지수를 기초 자산으로 하는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에 가입한 한국 투자자들이 새해 초 수조 원대 손실을 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홍콩의 다른 대표 지수인 항셍지수(HSI)의 경우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연속 3년 하락했다. 올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라 1971년 지수 출범 이후 처음으로 ‘4년 연속 지수 하락’의 불명예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뒤늦게 상황을 간파한 기업들은 홍콩 증시에서 달아나고 있다. 18일 상하이증권보에 따르면, 올해 기업 55곳이 홍콩 증시에서 상장 폐지했다. 올해 홍콩 증시의 IPO(기업 공개) 규모도 3년 전의 1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홍콩 당국은 지난달 주식 거래 인지세를 낮추는 등 진화에 나섰다.

홍콩 매체들은 내년 미국의 금리 인하로 해외 자본이 홍콩 증시로 다시 흘러들 것이란 장밋빛 기대도 하고 있다. 하지만 홍콩이 과거 인기를 되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영국 자산 운용 그룹 슈로더의 케이코 콘도는 “내년에도 미국 대선 등 지정학적 요인들 때문에 세계 투자자들이 중국 시장에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 경제 매체 차이신도 “내년 홍콩 증시의 ‘V’ 자형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