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토(大陸)’가 아니고 ‘중국(中國)’이라고 똑바로 말하세요”
6일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집권 민진당 선거 사무소에서 자원봉사자와 이야기하던 중 ‘중국 본토’란 단어를 썼다가 이런 타박을 들었다. 그는 “대만과 중국은 완전히 다른 곳이니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말라”면서 “(중국어 발음의) ‘권설음(捲舌音)’이 심한데, 혹시 중국에서 염탐하러 왔냐”며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권설음은 혀를 말아서 내는 소리로, 대만 사람들은 거의 쓰지 않는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전달한 명함에 하필 ‘베이징 특파원’이라고 적혀 있어 토종 한국인이라고 거듭 설명해야 했다.
13일 치르는 대만 총통 선거의 최대 쟁점 중 하나는 정체성이다. 중국과 대만의 연결 고리를 끊으려는 반중(反中) 성향의 민진당과 중국과의 유대감을 중시하는 친중 성향 국민당의 갈등이 표출되면서 공식 국호 ‘중화민국’을 그대로 쓸 것인가, 대(對)중국 기본 원칙 ‘92공식(共識)’을 계승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 것이다. 92공식은 하나의 중국은 인정하되 누가 ‘진짜 중국’인지는 각자 해석하자고 한 1992년 합의를 말한다.
민진당은 ‘중화민국’을 가리고 ‘대만’을 내세우고자 한다. 지난달 30일 총통 후보 TV 토론회에서 민진당 라이칭더 후보는 “중화민국 (헌법)을 양안의 ‘호국신산(護國神山·나라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삼는 것은 평화를 촉진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대만에 재난을 내리려는 건가”라고 했다. 대만뿐 아니라 중국 본토까지 영토에 포함하고, 대만인을 중국인으로 규정한 현행 헌법을 겨냥해 ‘대만의 독립성을 해치고 있다’고 비판하며 향후 개헌 가능성까지 시사한 것이다.
앞서 지난해 10월 민진당 정부는 건국기념일(쌍십절·10월 10일) 행사의 공식 표어에 ‘중화민국’을 빼고 ‘대만’을 사용했다. 당시 차이잉원 총통은 축하 연설에서 ‘중화민국’은 7차례만 언급한 반면 ‘대만’은 43번 말했다. 국민당 허우유이 후보는 민진당의 이런 정명(正名·국호 바로잡기) 시도를 비판하며 쌍십절 공식 행사에 불참하는 등 반민진당 민심 결집에 주력했다.
민진당은 32년 동안 중국과 대만의 관계 설정 토대로 여겨져온 ‘92공식’에도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라이칭더는 지난달 30일 “허우 후보는 자꾸만 옛 정책을 내세운다. 예컨대 2024년이 됐는데도 ‘92공식’을 언급하고 있다”고 했다. 차이잉원 총통도 92공식이 사실상 ‘일국양제(중국이 홍콩이나 마카오에 적용하고 있는 한 나라 두 체제 정책)’라고 주장한다. 반면 허우 후보는 “92공식은 정치를 내려놓고 인민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중국과의 관계를 두고 진영 대결이 뚜렷해지면서 ‘언어 분리’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민진당 정치인들은 유세 현장 등 공식 석상에서 표준 중국어와 통하는 ‘궈위(國語·대만 표준어)’ 대신 대만 고유 방언인 ‘타이위(臺語·민난어)’나 객가어(客家語)를 쓴다.
선거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한국 관련 이슈도 떠오르고 있다.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의 잠수함 설계 도면이 대만으로 유출된 사건과 관련, 이를 한국 언론 등에 제보한 당사자가 국민당의 친중 성향 의원이라는 뉴스가 6일 현지 언론에서 비중 있게 보도됐다. 민진당은 “국민당이 중국의 사주를 받고 대만의 국방력 확대를 막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13일 열리는 대만 총통 선거는 반중·친미 성향의 집권 민진당과 친중 성향의 제1 야당 국민당 후보가 맞붙은 가운데 청년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중도 성향 민중당 후보가 뒤따르는 구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