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독립 일꾼’이라고 스스로를 칭했던 라이칭더 민진당 후보가 총통(대통령 격)에 당선됐다. 13일 치러진 총통 선거에서 라이칭더는 40.05%의 득표율로 친중(親中) 성향 제1야당 국민당 허우유이(득표율 33.49%)를 눌렀다. 제2야당 민중당의 커원저 후보는 예상보다 훨씬 높은 26.4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번 선거 투표율은 71.86%로, 직전 선거 때인 2020년(74.9%)보다 낮지만 2016년(66.27%)에 비해 높다. 독립 성향인 민진당의 정권 재창출로 인해 대만은 반중(反中)·친미(親美) 기조를 유지하게 됐지만, 중국의 군사·경제 압박이 강화되며 대만해협에 긴장의 파도가 높아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번 선거에서 대만 민심은 지난 2016·2020년에 이어 또다시 반중 정당을 선택했다. ‘중국과 대만은 서로 예속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차이잉원 노선’의 손을 다시 한 번 들어준 것이다. 선거 막판에 마잉주 전 대만 총통이 언론 인터뷰에서 거론한 ‘시진핑 신뢰론’이 주목 받으며 국민당의 이미지가 타격을 입은 것도 결과에 영향을 끼쳤다.
◇ ‘제3 정당’이 민진당 반대 표를 국민당과 양분
‘새싹 운동’을 일으킨 제3정당인 민중당이 민진당에게 승리를 안긴 측면도 있다. 지난 2일까지 공개된 여론조사에서 라이칭더는 허우유이를 오차 범위 이내인 3~5%포인트 앞서며 초박빙 승부를 예고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양당의 격차(6.6%포인트)가 예상보다 컸다. 청년층과 중도층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은 커원저 후보가 예상보다 선전하면서 반(反)민진당 표를 국민당과 양분한 것이 판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민진당의 ‘콘크리트층’은 전체 유권자의 40% 수준이기 때문에 민중당이 20%의 지지율을 넘기면 국민당은 무조건 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실제로 최종 투표에서 민중당 지지자들은 대부분 국민당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커원저는 정치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득표율 16~17%보다 높은 20% 중반을 기록하며 국민당을 박스권에 가뒀다. 앞서 지난해 11월 커원저는 허우유이와의 단일화 협상에도 실패했다.
라이칭더는 이번 정권 재창출로 두 가지 ‘최초 기록’을 세우며 대만에서 반중·친미 ‘차이잉원 노선’이 계속될 것을 예고했다. 우선 2000년 이후 8년 주기로 민진당과 국민당이 번갈아 정권을 잡던 ‘8년 정권 교체 공식’을 깼다. 중국 입장에서는 차이잉원 총통의 임기(2016~2024년) 동안 대(對)대만 영향력 약화를 겪었는데, 라이칭더의 등판으로 이를 만회할 기회를 놓친 셈이다. 둘째로 대만에서 직선제 시행 이후 처음으로 부총통 출신이 총통에 올랐다. 국민당의 롄잔 부총통과 민진당의 뤼슈롄 전 부총통 등 여러 부총통들이 대권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경력자’가 국정의 핸들을 잡기 때문에 정책 연속성을 보장하는 측면이 있다. 대만에서 총통 당선인은 취임일(5월 20일)까지 4개월의 공백이 있는데, 현 부총통인 라이칭더는 이 기간을 최대한 활용해 인수·인계 과정을 밟을 수도 있다.
◇지지기반 약해졌는데 중국은 강경해져
그러나 라이칭더가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차이잉원보다 지지 세력은 크게 약화됐는데, 맞서야 하는 상대인 중국은 ‘통일’을 외치며 강경해졌기 때문이다. 라이칭더는 1996년 이후 당선된 총통 중에 천수이볜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득표율 50%를 넘기지 못한 이른바 ‘약세 총통’이다. 절대적인 지지층 없이 분열된 대만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차이잉원은 2016년(득표율 56.12%)과 2020년(57.1%) 총통 선거에서 2위와 표차를 크게 벌렸고, 마잉주 전 총통도 재선된 2012년에 51.6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번 선거에서 ‘국회 과반’도 달성하지 못했다. 민진당은 총통 선거와 같은 날 치러진 총선에서 입법원(국회) 전체 의석(113석)의 45%에 불과한 51석(종전 62석)을 차지했다. 국민당은 과반석 확보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민진당보다 한 석이 많은 52석(종전 37석)을 얻었다. 남은 13석은 민중당이 8석(종전 5석), 무소속이 5석씩 가져갔다. 1986년 창당한 민진당은 차이잉원 총통 당선 당시인 2016년 처음으로 대권과 국회 권력을 동시에 장악하며 전성시대를 열었는데 또다시 국회에서 ‘여소야대’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차이잉원 총통은 지난 6일 유세에서 라이칭더에게 정권을 맡기라고 호소하면서 “총통과 부총통이 운전대를 쥐고 있지만 엔진은 국회”라고 평가했다.
결국 라이칭더는 집권 후 분열된 민심을 달래고 제3정당 민중당에게 손을 내밀어가며 국정을 운영해야 할 처지다. 그러나 중립을 표방했던 민중당은 지난해 11월 국민당과 ‘남백합(국민당과 민중당의 단일화)’을 논의했던 세력으로 민진당과 정치색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양안 문제에서는 국민당과 비슷하게 중국에 우호적이란 분석도 있다. 대만 정치 전문가들은 민중당이 민진당을 외면하고 국민당과 손을 잡거나, 사안 별로 입장을 달리하며 존재감 과시에 몰두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중국의 위협과 미국의 불신 극복해야
대만 밖으로 눈을 돌리면 더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중국이 ‘구제불능의 대만 독립주의자’로 낙인 찍은 이상 양안(중국과 본토) 문제를 관리하기 어렵고, 차이잉원 총통처럼 미국의 절대적 신뢰도 얻지 못한 상태다. 중국이 양안 관계 안정을 위해 라이 당선인을 달랠 가능성은 매우 낮고, 라이칭더가 92공식(컨센서스)을 수용하거나 ‘대만과 중국은 서로 속하지 않는다’는 차이잉원의 입장을 거부할 가능성도 사실상 없다. 결국 라이칭더의 임기 동안 양안 대화가 전면 중단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또 중국은 오는 3월 양회(兩會) 시기부터 라이칭더가 취임하는 5월 20일까지 경제·외교·군사 수단을 총동원해 대만 압박 수위를 높이며 길들이기에 나설 수 있다. 궈위런(郭育仁) 대만 국책연구원 부원장은 “이번 선거는 양안 관계의 분수령”이라며 “선거 당일부터 대만 총통 취임식까지 대만해협 정세가 빠르게 요동칠 것”이라고 했다.
대만의 ‘뒷배’를 봐주는 미국도 라이칭더와 신뢰 관계를 충분히 구축하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장우웨(張五岳) 대만 단장대학 양안관계연구센터 주임은 “미국은 차이잉원보다 강한 라이칭더의 독립 성향을 우려하고 있다”면서 “다만 미·중 소통 채널이 원활하게 작동하면 대만해협에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다.
이번 대만 선거 결과는 한국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쑤즈윈(蘇紫雲) 대만 국방안보연구원 국방전략자원연구소장은 “한국의 에너지 62%, 일본의 에너지 90%가 대만해협을 통과하는 등 이곳의 안보는 주요국들의 이익과 직결돼 있다”고 했다. 김준규 코트라 타이베이무역관장은 “대만은 한국의 6위 교역 상대이고, 반도체 산업의 주요 파트너”라면서 “새 총통이 당선되면 반도체 등 주요 산업의 협력에도 변화가 생긴다”고 했다.
대만에선 이날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역 1만7794곳의 투·개표소에서 총통 선거와 113명의 입법위원(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치러졌다. 직선제가 실시된 1996년 이후 8번째 총통 선거로, 유권자는 약 1950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