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3일 총통 선거에서 당선된 집권 민주진보당(민진당)의 라이칭더 부총통./AP 연합뉴스

‘배신자’ ‘트러블메이커’

중국 지도부는 지난해 독립 성향이 강한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부총통이 민진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되자 그를 이렇게 부르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중국이 대만의 대권 주자를 노골적으로 비난한 것은 라이칭더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대만 정계에서도 라이칭더는 오랫동안 차이잉원 현 총통보다 독한 독립주의자로 평가돼왔다. 총통·부총통으로 함께 했던 두 사람 간에 독립 성향 차이로 불화가 잦았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라이칭더는 2011년 타이난 시장 시절에는 중국식 병음 표기를 거부하는 조례를 제정했고, 국호를 중화민국에서 대만공화국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조했다. 그가 지난달 총통에 당선되면서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가 급격히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부터 제기되는 이유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 대만해협마저 위태로워질 것이란 분석도 있다. 라이칭더가 이끌 대만, 그리고 대만을 둘러싼 세계 정세는 어떻게 바뀔까.

◇10년 전 블랙리스트에 오른 라이칭더

지난달 13일 라이칭더 후보는 40.05%를 득표해 제16대 대만 총통에 당선됐다. 대만에선 2000년부터 8년마다 정권 교체가 이뤄져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그가 8년 동안 집권할 가능성이 높다.

라이칭더는 역대 대만 총통들과 비슷하게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치인이다. 1959년 타이베이현(신베이)의 시골 해안 마을 완리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뛰어난 두뇌를 타고난 덕분에 대만대 물리치료학과, 대만성공대 의대, 하버드 대학원을 나왔다. 타이난시에서 내과 의사로 일하다 1994년 정치에 입문했고, 1998년 타이난시를 지역구로 입법위원(국회의원 격)에 당선돼 4선을 했다. 2010년에는 타이난 시장에 당선됐고 연임에 성공하면서 2017년까지 시장을 지냈다.

중국에서 독립주의자로 낙인 찍힌 것은 그가 타이난 시장 시절이던 2014년 때다. 태어나 처음으로 중국 본토를 방문한 그는 명문대학인 상하이 푸단대에서 “대만 독립은 대만인의 자결권을 위한 것이고, 대만 내에서 완전한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중국의 최대 금기인 1989년 천안문 사태도 언급하며 ‘애국운동’이라고 규정했다. 이 방문으로 중국 당국은 라이칭더를 블랙리스트에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미움을 샀지만 대만 정치권에선 승승장구했다. 2017년 경제 부진 등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린취안 행정원장(국무총리 격)의 후임으로 중앙 정치 무대에 올랐다. 2019년 대선을 앞두고 민진당 내부 경선에서 차이잉원 총통과 경쟁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1월 대만 총통 선거에서 승리해 오는 5월부터 대만 총통 임기를 시작한다.

라이칭더의 승리는 대만 정치사에 여러 기록을 세웠다. 우선 첫 여야 정권 교체가 이뤄졌던 2000년 이후 첸수이볜(민진당)·마잉주(국민당)·차이잉원(민진당)으로 이어져온 양당의 8년 주기 정권 교체 공식이 깨지게 됐다. “대만인의 운명은 대만인이 결정한다”는 대만독립론을 기치로 내걸고 1986년 창당한 민진당은 연속 최장 집권 기간을 세웠다. 라이칭더는 1996년 총통 직선제 도입 뒤 첫 부총통 출신 총통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취임하는 5월까지 진행될 신구 정권 이양 과정도 순조로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의외로 양안 현상 유지 가능성 높아

라이칭더는 명백한 독립주의자이지만, 당분간 양안관계가 급격히 변화할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된다. 첫째는 그가 입법원(국회 격) 등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라 헌법·국호 수정 등 레드라인을 넘을 수 없고, 둘째는 중국이 라이칭더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기에 대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이잉원 집권기에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가 이미 최악의 수준에 이르렀기에 전쟁을 치르지 않는 한 추가로 악화되기 어렵기도 하다. 대만 싱크탱크인 국책연구원의 궈위런(郭育仁) 부원장은 “친중(親中) 성향 허우유이 국민당 후보가 당선됐다면 중국의 통일 기대가 오히려 큰 군사 압박을 불러왔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미 라이는 대선 전후로 양안 관계에 대해 이전보다 온화한 입장을 밝히며 중국과의 갈등을 피하고자 한다. 지난달 선거를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대만은 이미 주권국이기 때문에 총통에 당선되더라도 독립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언뜻 독립 주장으로 들리지만, 방점이 ‘독립 선포 않는다’에 찍혀 있는 말이다. 당선 소감에서는 거세질 중국의 압박을 의식한 듯 “양안은 대화·교류해야 리스크를 낮출 수 있다”면서 “우리는 반드시 교류로 봉쇄를, 대화로 대항을 대체해야 한다”고 했다.

라이는 민진당 내부의 강경 독립 세력과 현실 정치를 중시하는 세력을 모두 품고 가야 하는 과제 또한 맞이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대만 독립을 마음껏 외칠 수 있었지만, 총통에 당선된 이상 한쪽으로만 치우칠 수 없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가 부총통 때부터 적극적으로 관계를 강화해온 조 바이든 미국 정부 또한 중국의 대(對) 대만 영향력 확대는 견제하지만, 대만 독립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일관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대만의 호국신산(護國神山·나라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불리는 반도체 산업은 적극 육성할 것으로 보인다. 라이는 13일 당선 확정 뒤 가진 외신 기자회견의 상당 부분을 반도체 부문에 대한 언급에 할애했다. 그는 “세계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완전한 산업 공급망을 형성하기 위해 재료 및 장비 연구·개발(R&D), 집적회로(IC) 설계·제조·패키징·테스트 분야 등에서 반도체 산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차이잉원 현 총통의 반도체 주도 성장 전략을 차기 정부에서도 이어나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중국이 가까운 시일 안에 대만을 군사 공격하여 전쟁이 날 가능성은 작다고 평가된다. 중국이 내부 여론과 서방 자유 진영의 대만 지지를 의식하며 ‘라이칭더 길들이기’에 나서겠지만, 자국의 피해 또한 예상되는 군사 공격 카드는 마지막으로 미룰 것이기 때문이다. 대만 대선 직후인 지난달 15일 중국 공산당 이론지 ‘추스(求是)’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2년 7월 당중앙 ‘통일전선공작회의’에서 발표한 연설을 게재했는데, 여기에는 “무력 통한 통일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없다. 중국은 향후 일정 기간 동안 대만 압박 수위를 조절하면서 대만 사회에 ‘통일 시 자치를 허용하고, 경제 혜택을 제공할 것’이란 선전 공작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만을 방문 중인 미 하원 아미 베라 의원(민주당)과 마리오 디애즈발라트 의원이 1월25일 총통부에서 차기 총통 당선인인 라이칭더와 샤오메이친 부총통 당선인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베라 의원, 디애즈발라트 의원, 라이칭더 총통 당선인, 샤오메이친 부총통 당선인. /EPA 연합뉴스

◇방심할 수 없는 중국의 대만 위협

라이칭더 집권기에 양안 관계가 급변하지 않을지라도 중국의 대만 압박은 계속될 전망이다. 문공(文攻·말로 공격), 무하(武嚇·무력으로 협박), 경제 압박 등의 수단을 동원해 대(對)대만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라이의 당선 전후 유화적인 제스처에도 중국은 대만에 대한 군사·경제 압박을 계속해서 가하고 있다. 대만 국방부에 따르면 지난달 대만 주변 공역과 해역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군용기 301대와 군함 136척이 각각 포착됐다. 중국의 ‘정찰 풍선’으로 의심되는 물체는 57차례 대만 영공을 침범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8월 한국·미국·일본 등 78국에 대한 자국민의 단체관광을 전면 허용했지만, 대만은 여전히 리스트에서 제외돼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중국의 대만해협 민간항로(M503) 일방 조정이다. M503 항로는 양안의 사실상의 경계선인 대만해협 중간선에서 불과 7.8km 떨어져 있다. 중국 민항국은 지난달 30일 “이달 1일부터 M503 항로의 절충 조치를 취소한다”며 “M503 항로는 물론 동서로 연결되는 W122, W123 항로도 사용하겠다”고 갑작스레 발표했다. 새로 개설되는 항로가 대만 침공용 군용기 루트로 사용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대만 정부는 7일 “중국이 대만해협 상공을 지나는 민간항로를 일방적으로 조정하는 악의적 조치를 취해 안보 위협을 불러왔다”면서 3월부터 전면 재개하려고 했던 중국행 단체관광을 다시 막기로 했다.

중국의 ‘대만 압박 시간표’에서 단기적으로는 오는 3월·5월·10월을 주목해야 한다. 중국 최대 정치 행사인 3월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라이칭더 정권에 대한 대응 수위가 결정되고, 이때부터 5월 20일 라이칭더 총통 취임 직전까지 대만에 대한 중국의 압박과 위협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 전환점은 미국 대선(11월 5일)을 앞둔 10월쯤 열릴 전망인 중국공산당 전체회의가 꼽힌다. 미국의 대선 상황과 라이칭더에 대한 초기 평가를 종합해 앞으로의 대만 압박 수위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대만해협 안정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는 목소리도 있다. 라이칭더가 강경한 독립 입장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중국이 통일 시기를 앞당기기를 원한다면 중국의 대(對)대만 군사·경제 압박이 유례 없이 강화되며 대만해협에 긴장의 파고가 순식간에 높아질 것이란 주장이다.

대만 집권 민진당 지지자들이 대만 선거 직전인 지난달 11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대만을 계속 자유롭게'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여소야대 대만 국회는 라이칭더의 걸림돌

라이칭더가 내부적으로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맞서야 하는 상대인 중국은 강경해졌는데, 차이잉원보다 지지 세력은 크게 약화됐기 때문이다.

라이칭더는 여소야대 정국과 함께 친중(親中) 입법부 수장과 손발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다. 이번 대만 대선과 같은 날 치러진 입법원(국회 격) 선거에서 친중 성향의 국민당이 전체 의석(113석) 가운데 52석을 차지하며 기존 37석에서 의석수를 크게 늘려 ‘여소야대’ 국면을 만들었다.

민진당은 입법부 수장 자리라도 차지하고자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2일 대만 중앙통신에 따르면 입법원이 전날 치른 입법원장(국회의장) 선거에서 국민당 한궈위 위원이 2차 투표까지 간 결과 재적 105표 중 54표로 새 입법원장에 선출됐다. 한궈위는 제1야당 국민당의 전 총통 후보로 강한 친중 성향을 드러낸 인사다. 그는 2019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중국을 방문해 고위 관료들과 만나고 92 공식(1992년 중국과 대만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표현은 각자 하기로 한 합의) 지지의 뜻을 밝혔다. 대만 방송 TVBS는 “4년 전 대선에서 참패해 부활 가능성이 없었던 한궈위가 돌아왔다”며 “여소야대 체제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라이칭더는 1996년 이후 당선된 총통 중에 천수이볜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득표율 50%를 넘기지 못한 이른바 ‘약세 총통’이다. 절대적인 지지층 없이 분열된 대만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차이잉원은 2016년(득표율 56.12%)과 2020년(57.1%) 총통 선거에서 2위와 표차를 크게 벌렸고, 마잉주 전 총통도 재선된 2012년에 51.6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한국에도 영향 끼칠 대만 새 정부

라이칭더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에 미칠 영향도 주목된다. 쑤즈윈(蘇紫雲) 대만 국방안보연구원 국방전략자원연구소장은 “한국의 에너지 62%, 일본의 에너지 90%가 대만해협을 통과하는 등 이곳의 안보는 주요국들의 이익과 직결돼 있다”고 했다. 김준규 코트라 타이베이무역관장은 “대만은 한국의 6위 교역 상대이고, 반도체 산업의 주요 파트너”라면서 “반도체 등 주요 산업의 협력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대만이 한국과 관계 강화를 추구하면 우리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과 공급망 장악을 위해 대만이 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길 바라고 있다”면서 “라이칭더 총통 당선인이 선거 기간에 한국과의 신(新)공급망 구축 등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했다. 다만 우리 정부는 라이칭더 당선 축하 인사를 관례대로 대만 대표부를 통해 전달하고, 선거에 대한 메시지도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유지되고 양안 관계가 평화적으로 발전해나가기를 기대한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대만 문제에서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중한 입장을 유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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