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방미를 계기로 결속을 다지는 가운데, 중국이 5년만에 최고위급 인사를 북한에 보내 대북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에 대한 지렛대로 쓸 수 있는 ‘북한 카드’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서열 3위인 자오러지(趙樂際)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국회의장 격)은 11일 오후 평양에 도착해 최룡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만나 “북·중 관계가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협력할 준비가 됐다”고 했다. 자오러지는 2019년 6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이후 처음으로 북한을 찾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중국 상위 7명, 시진핑 포함)이다. 사흘간 머물면서 중국과 북한의 수교 75주년 기념 우호의 해 개막 행사 등에 참석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도 만날 전망이다. 이번 방북 계기로 시진핑과 김정은 간 정상회담이 논의될 가능성도 주목된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자오러지는 이날 평양에서 최룡해와 회담을 갖고 “중국은 북한 측과 함께 올해 양국 우호의 해를 기회 삼아 고위급 교류를 강화하고, 호혜 협력을 심화하길 바란다”면서 시진핑의 말을 인용해 “중·북 관계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시종일관 확고부동한 우리의 전략적 방침”이라고 했다. 이어 “양국의 전통적인 우의는 양당과 양국 선대 지도자들이 직접 맺고 정성스럽게 키운 것”이라며 “중국은 양국 관계가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북한 최고인민회의와 협력할 준비가 됐다”고 했다.
최룡해는 “피로써 맺어진 북·중 우의는 역사가 유구하고 뿌리가 깊다”면서 “김정은 총비서와 시진핑 총서기의 전략적 영도 하에 양국 친선 관계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섰다”고 화답했다. 이어 “북한은 중국과 손잡고 양국 지도자의 영도에 따라 수교 75주년과 친선(우호)의 해를 계기로 각 분야의 교류·협력을 심화하고 우호·협력 관계를 부단히 발전시키길 원한다”고 밝혔다.
북·중은 회담 후 외교·공무 비자 면제, 고전 작품 번역·출판, 세관·검역, TV·라디오방송, 우편·특송 등 분야의 협력 문건에도 서명했다. 중국 외교부는 두 사람이 국제·지역 문제와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중국이 이번 방문을 통해 미국에 대북 영향력을 과시하고자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류둥수 홍콩시립대학 교수는 11일 CNN에 “미국이 일본·한국과 더욱 밀착하는 상황에서 중국은 (북한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싶어한다”면서 “중국은 동시에 북한 최고지도자의 진짜 의중이 무엇인지도 이번 방문을 통해 파악하고자 할 것”이라고 했다. 리밍장 싱가포르 난양이공대학 교수는 “중국을 둘러싼 지정학적 상황이 악화하면서 중국은 북한을 훨씬 더 지지하거나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북·중 밀착 속에 한·미·일 대 북·중·러 신(新)냉전 구도가 본격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김정은이 지난해 9월 러시아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데 이어 푸틴이 올해 중에 북한을 방문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푸틴과 시진핑은 올해 6월·10월에 만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미국 싱크탱크 스팀슨 센터의 윤선 연구원은 “북·중·러 권위주의 3국은 미국이 이끄는 동맹에 대해 안보 우려를 공유하지만, 중국은 북·러와 ‘철의 삼각관계’로 돌아가지는 않으려 한다”면서 “북·러의 과도한 밀착이 자국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는 자오러지 방북 관련 “한반도 주변국을 비롯한 관련 국가들의 북한과의 교류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준수하는 가운데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인애 통일부 부대변인은 12일 정례브리핑에서 “중국과 북한이 금일 상호 교류와 협력 강화에 대해 밝힌 만큼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유의해서 지켜보고 있다”면서 이렇게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