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5일 미군과 필리핀군은 필리핀 루손 섬의 샌 앤토니오 인근 남중국해에서 가상의 적(敵)전함을 파괴하는 훈련을 했다. 2주 간 전개된 두 나라 연합훈련 발리카탄(Balikatanㆍ’어깨를 나란히’)의 일환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장(戰場)에서 러시아군을 강타해 유명세를 날린 차륜형 트럭 기반의 다연장 로켓 ‘하이마스(HIMARS)’가 19㎞ 떨어진 해상의 필리핀군 폐(廢)전함을 겨냥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지켜보는 자리였다.
그러나 하이마스는 6발을 모두 소진하고도 명중에 실패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육상에 비해 해상 타깃이 얼마나 맞추기 힘든지를 보여줬다. 결국 F-35 전투기가 유도탄을 떨어뜨려 파괴했다.
2014년부터 시작한 발리카탄 훈련은 전통적으로 재난 구호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 안보의 최대 위협국이 되고 필리핀ㆍ중국 간 남중국해 분쟁이 계속 되면서, 양국 훈련도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격퇴하는 쪽으로 초점이 바뀌었다.
이날 폐전함 타격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사시 중국 전함들을 남중국해에서 파괴하는 임무를 맡은 미 해병대 제3 연안해병연대(하와이 소재)가 발리카탄 훈련 기간과 그 이후 필리핀의 최북단 섬들에서 벌인 활동을 최근 보도했다.
◇제1열도선에 중국 전함 가둬 놓는 역할
발리카탄 훈련엔 미 제3 해병연대 병력 2500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필리핀 최북단의 잇바얏(Itbayat) 섬에서 3일 간 머물며 지형을 관찰했다. 타이완 최남단에서 156㎞ 떨어진 곳이다.
미 해병대는 그동안 전세계 분쟁 지역에 가장 먼저 투입되는 ‘119′ 같은 부대로, 이라크ㆍ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최근 20여 년 간 전력을 쌓았다. 그러나 주적(主敵)과 전장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미 해병대의 주(主)임무는 타이완 침공 초기에 미사일로 중국 전함을 공격해 오키나와~타이완~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남국해의 제1 열도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최대한 발목을 잡아, 멀리 떨어진 미군 전력이 이 해역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버는 것이다. 또 센서와 소형 드론으로 최전선에서 전장의 정확한 상황과 타깃 정보를 후방으로 보낸다.
그러기 위해선 미 해병대 병력은 제1 열도선에 속한 섬들 사이를 레이더 시스템과 미사일 발사장비를 갖추고 신속하게 오르내리며 중국의 감시망을 헷갈리게 해야 한다. 제3 해병연안연대 병력의 잇바얏 섬 훈련도 이런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주변 섬들 지형에 익숙해지기 위한 것이다.
◇최대한 가볍게, 적에겐 최대한 치명적이게
그러나 이곳은 중국의 ‘뒷마당’이다. 중국은 막대한 미사일과 온갖 종류의 정찰 드론을 갖췄고, 인근엔 중국 해군 함대와 군 기지들이 있다. 미 해병대가 어디서 뭘 하는지 파악할 막대한 자원을 보유했다. 또 필리핀 최북단의 섬들은 해안 지역이 다 도로로 연결되지도 않고, 레이더 시스템이나 미사일 포대가 이동할 만큼 도로가 넓지도 않다.
제3해병 연안연대의 존 리헤인 대령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적의 의사결정 과정을 헷갈리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벤저민 젠슨 미 전략국제문제센터(CSIS)의 선임 연구원은 “해병연안연대는 21세기판 연안기병(騎兵)처럼 민첩하게 섬들을 오르내리며 중국이 계속 이 병력을 주시하게 해야 한다”며 “그만큼 중국의 정보 네트워크에 막대한 부담을 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 해병대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야 한다. 적에겐 치명적인 존재이면서, 매우 가볍게 이동해야 한다. 자신의 존재는 최대한 감추면서, 적의 움직임을 최대한 파악해야 한다. 무선이나 레이더를 켜는 순간 타깃이 되는 중국의 코앞에서 이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지난 2년 간 미 제3해병연대는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서 가상 전투를 했다. 전자 스펙트럼에 소음을 발생시켜 적을 헷갈리게 하며 교신을 하고, 발각돼도 큰 의미가 없는 대형(隊形)에 주의가 쏠리도록 위장하는 연습을 되풀이했다.
대형 서버는 랩톱 컴퓨터로 대체되고, 3D 프린터로 필요 부품을 임시변통한다. 리헤인 대령은 “이동 물자를 최대한 경량화하면서도 상대에게 의미 있는 타격을 최대한 가할 수 있는 균형을 찾아, 계속 여러 실험을 한다”고 WSJ에 말했다.
◇지형을 숙지해야, 동원 가능한 물자 파악
미 해병대는 이곳에서 섬의 활주로, 해안선이 어떤 운송수단을 감당할 수 있는지 모두 평가했다. 또 병력 이동 중의 연료 소진 상태를 점검하고, 시냇물을 직접 정화해 보고, 임시 헬기 착륙장도 확인했다. 마을 도로와 교량의 폭과 강도(强度)를 따져 이동 가능한 군 차량도 확인했다.
제3 해병연안연대의 일부 병력은 잇바얏 섬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는 2개의 바위 섬인 마불리스(Mavulis)로 이동했다. 타이완 최남단에선 140㎞ 떨어졌다. 이곳은 V-22 오스피리 수직 이착륙기도 내릴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위성사진으로는 도보 이동이 가능한 듯했던 산악 통로도 현실은 달랐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직접 가서 보고 사진 찍고 이해하는 ‘물리적 정찰’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두 가지 장애물
한편 미 해병대 대령 출신인 전략국제문제센터(CSIS)의 선임 고문 마크 칸시안은 WSJ에 미 해병연안연대의 이곳 작전에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고 말했다.
우선 ‘중국 방어선’ 안에 있는 이 해병대 병력에 대함(對艦) 미사일을 어떻게 공급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작년에 이곳에서 치른 워게임에선 미 해병대가 몇 차례 유효한 공격을 했지만, 곧 미사일이 소진됐다고 말했다.
또 ‘접근성’도 불투명하다. 필리핀 정부가 자국과 중국 간 남중국해 분쟁에 미 해병대가 개입하는 것은 반기겠지만, 중국의 타이완 공격을 격퇴하려고 이곳에 접근하는 것을 환영할지는 불확실하다.
미 해병대는 현재 각각 2000명 안팎인 3개의 연안연대를 보유하고 있다. 해병대의 가치는 무력 분쟁 현장에 가까울 때 가장 유효하다. 오키나와에 위치한 제12 해병연안연대는 류큐 열도를 따라 타이완으로 북쪽에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남쪽에서 타이완으로 접근하는 제3 해병연안연대는 우선 하와이에서 이곳까지 중국의 포화(砲火)를 뚫고 도달해야 한다.
중국은 미국의 남중국해ㆍ타이완 접근을 막는, 이른 바 ‘반(反)접근ㆍ지역 거부(A2/ADㆍAnti-Access/Area Denial) 전략을 편다. 미 해병연안연대의 역할은 그 ‘문’이 닫히지 않게 늘 한 발을 껴 놓고 있다가 유사시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탱크 없애고, 전투기 줄이고…미 해병대의 대변신
미 해병대는 2020년 3월, 중국을 주적으로 한 10년짜리 대변신 프로그램인 ‘병력 디자인(Force Design) 2030′을 발표했다.
주(主)임무가 ‘제1열도선 내 중국 봉쇄’로 바뀌다 보니, 보유한 탱크도 없애고 F-35 전투기와 헬리콥터의 수도 줄였다. 이렇게 줄인 160억 달러로 중국 전함을 공격하는 미사일 포대를 구축하고, 무기 장착이 가능한 정찰 드론 등의 능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예멘 후티 반군의 상선 공격 이후 미 해병대의 신속배치군이 상시 홍해에 배치돼 있는 것과 같이, 예측 불허의 무질서 속에서 미 해병대 수요는 늘 존재한다. 그래서 많은 미 해병대 예비역 장군들은 “태평양 위협에 초점을 맞춘 현대화 노력은 지지하지만, 이게 해병대의 글로벌 대응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려한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