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6일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 올라온 한 블로거의 글. 중국이 8나노미터급 노광장비를 개발해 큰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취지의 제목이 달려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중국 공업정보화부가 공개한 지표를 잘못 읽어서 나온 가짜뉴스로 밝혀졌다. /바이두

추석 연휴에 중국이 자체 기술로 8나노 반도체 제조가 가능한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를 개발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먼저 중국 포털사이트와 소셜미디어에 소식이 올라왔고, 대만·홍콩 매체와 일부 국내 언론도 이 소식을 따라 보도했어요.

결과적으로 이 뉴스는 엉뚱한 오보였습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가 9월초 홈페이지에 올린 2024년판 중요기술장비 보급 목록에 나온 중국산 노광장비에 대한 기술 지표를 잘못 읽어 벌어진 해프닝이었어요. 미국 등 서방의 강도 높은 반도체 제재 속에 어떻게든 기술 자립을 이루겠다는 조급증에서 비롯된 소동으로 보입니다.

중국 내에서는 최근 ‘중국판 엔디비아’를 자처했던 인공지능(AI) 반도체 분야 유니콘들도 줄줄이 무너지고 있어요. 대단한 기술을 개발한 것처럼 투자자금을 모았지만,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도산하거나 증시에서 퇴출당하고 있습니다.

◇“기술 돌파구 마련했다”고 했지만...

뉴스의 진원지는 공업정보화부 자료에 포함된 중국산 불화아르곤(Arf) 노광장비에 관한 기술 지표였어요. 여기에 ‘해상도 65나노미터 이하, 오버레이 정확도 8나노미터 이하’라는 문구가 있는데, ‘오버레이 정확도 8나노미터 이하’로 돼 있는 부분을 8나노미터급 반도체 제조가 가능하다는 의미로 오인한 겁니다. 이 장비는 상하이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MEE)라는 중국 국유 반도체 장비 제조사가 개발했다고 해요.

노광장비는 반도체 웨이퍼 위에 레이저 광원을 투사해 나노 단위의 정밀한 회로를 새깁니다. 전자 현미경으로 봐야 할 정도로 아주 작고 미세한 회로이죠. 해상도가 최고 65나노미터라는 건 65나노미터 굵기의 회로를 그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버레이 정확도는 반도체 웨이퍼 위에 여러 층의 회로를 쌓을 때 나오는 개념이에요. 회로를 중첩해서 새길 때 각 층의 회로가 기준 위치에서 얼마나 벗어나는지를 측정하는 값입니다. 그 오차를 8나노미터까지 줄일 수 있다는 뜻이죠.

중국 당국은 이 장비의 지표를 공개하면서 “의미있는 기술적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공개된 지표로 보면 이 장비는 이 분야 세계 최고 업체인 네덜란드 ASML이 2009년에 출시한 ‘트윈스캔 XT:1460K’라는 초기 DUV 모델과 사양이 비슷해요. ASML의 최신 DUV 장비는 해상도가 38나노미터 이하에 오버레이 정확도는 1.3나노미터 이하에 이른다고 합니다.

9월2일 중국 공업정보화부가 발표한 2024년판 중요기술장비 보급 목록 중 반도체 장비에 관한 부분. 붉은 선 안에 새로 개발한 심자외선 노광장비 2종의 기술 지표가 나와 있다. /공업정보화부

◇중 전문 매체도 “터무니 없는 혼동”

그런데도 중국 포털사이트와 소셜미디어에는 ‘국산 8나노미터 노광장비가 개발됐다’ ‘서방의 기술독점 속에 중국 과학기술의 실력을 드러냈다’는 등의 글이 다수 올라왔어요. “중국의 반도체 자립 능력을 끌어올리고 전 세계 과학기술 판도에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허위로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서방 기술매체는 물론, 중국 내 전문 매체에서도 곧바로 “터무니없는 혼동”이라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SMEE는 중국 내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진 노광장비 제조업체라고 할 수 있어요. 결과적으로 이 업체가 만들 수 있는 최신 노광장비가 ASML이 15년 전에 개발했던 제품 수준이라는 점만 드러낸 꼴이 됐습니다.

중국의 반도체 기술 관련 보도는 잘 가려서 봐야 해요. 시진핑 주석이 반도체 자립을 국가 목표로 제시하고 중국 정부가 막대한 반도체 기금을 조성하자, 시장에서 검증되지 않은 기업들이 기술력을 부풀려 공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광 공정은 반도체 웨이퍼에 레이저 광원을 투사해 나노 단위의 미세 회로를 새기는 작업이다. /ASML 홈페이지

◇‘중국판 엔디비아’의 몰락

중국 내에서는 지난 8월말 ‘중국판 엔디비아’로 통했던 샹디셴이라는 그래픽프로세서(GPU) 설계업체(팹리스)가 회사 해산을 선언했다는 보도가 나와 큰 충격을 줬어요.

샹디셴은 반도체 설계 전문가 탕즈민(唐志敏·58)이 2020년 충칭에서 창업한 스타트업으로 지난 2년 사이 자체 개발했다는 GPU 톈쥔 1·2호를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중국 내에서는 샹디셴의 기업 가치가 150억 위안(약 2조8000억원)에 이른다는 평가가 나왔죠. 충칭시는 지난 6월 샹디셴을 올해의 유니콘 기업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기업이 돌연 회사 해산을 선언하고, 직원 400명을 해고했으니 놀랄만한 일이죠. 중국 매체들에 따르면 이 회사가 개발한 GPU는 엔디비아는커녕 화웨이의 AI 칩 어센드 910시리즈보다 성능이 떨어져 판로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초기에 투자받은 자금이 떨어지고 추가 투자도 끊기자 도산 위기에 내몰린 거죠.

중국 충칭시의 한 산업단지 안에 있는 샹디셴 건물. 중국 매체 시대주보는 9월2일 이 건물의 출입문과 창문이 모두 굳게 닫혀 있고 종업원들도 출근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대주보

◇증시서도 퇴출 당해

데이터센터 내 서버 효율을 극대화하는 데이터처리장치(DPU) 개발로 주목을 받았던 베이징 쭤장(左江)과기도 지난 6월28일 금융 사기 혐의로 선전 증시에서 퇴출을 당했습니다. 이 업체는 한때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어요. 전 세계적인 AI 붐과 중국 정부 반도체 육성 정책의 수혜주가 될 것으로 보고 투자가 몰린 겁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증감위)가 조사한 결과, 판매 실적 등을 대거 부풀린 사실이 확인됐어요. 고객사에 팔았다는 DPU 제품이 대부분 이 회사 창고에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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