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술기업 화웨이가 작년에 개발해 내놓은 인공지능 칩셋 어센드 910B. /화웨이

미국 대선을 코앞에 둔 10월 하순 중국 화웨이가 다시 반도체 업계의 화제가 됐어요. 화웨이가 작년에 내놓은 인공지능(AI) 칩셋 ‘어센드 910B’를 분해해 봤더니 대만 TSMC가 생산한 7나노 반도체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TSMC는 과거 화웨이가 설계한 반도체를 위탁 생산했지만, 2020년 미국이 화웨이에 대한 제재를 발동한 이후에는 거래를 중단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TSMC가 제조한 반도체가 화웨이 AI 칩셋에 들어간 것이 확인됐으니 미국의 제재망에 큰 구멍이 생긴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TSMC가 조사한 결과, 중국 샤먼의 한 반도체 설계회사에 공급한 반도체가 화웨이로 흘러들어 간 사실이 확인됐어요. 화웨이가 제재 대상이 아닌 중국 회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TSMC에 몰래 주문을 냈다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반도체 설계를 넘어 자체 생산을 추진 중인 화웨이는 3배의 연봉을 내세워 TSMC 기술자 스카우트에도 열심이라고 해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반도체 기술 통제가 더 강화될 것으로 보고 기술과 인재 확보를 위한 총력전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캐나다 반도체 조사회사가 발견

캐나다 반도체 조사회사 테크인사이츠(Techinsights)는 최근 화웨이의 AI 칩셋 어센드 910B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TSMC가 7나노 공정으로 제조한 반도체가 들어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해요. 테크인사이츠는 정식 보고서 작성에 앞서 10월초 이 사실을 TSMC에 통보했고, TSMC는 곧바로 미국 상무부에 알리고 자체 조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TSMC는 이 반도체가 샤먼에 있는 중국 반도체 설계회사 소프고(SOPHGO·算能科技)의 주문에 따라 생산한 제품임을 확인했다고 해요. 이 회사는 화웨이 AI 칩셋에서 발견된 TSMC 7나노 반도체와 같은 제품 수십만개의 생산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TSMC는 10월11일 이 회사에 대한 제품 공급을 중단했어요.

소프고는 미국과 대만 언론에 자사가 연루된 사실이 공개되자 성명서를 내고 “화웨이와 어떤 거래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상무부와 TSMC는 이 회사가 화웨이의 대리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봐요.

화웨이를 대신해 대만 TSMC에 반도체 생산 주문을 한 의혹을 사고 있는 중국 반도체 설계회사 소프고의 푸젠성 샤먼 본사. /소프고

◇“TSMC, 중국 기업 2곳 거래 중단”

소프고는 암호화폐 채굴업체인 비트메인의 관계사입니다. 암호화폐 채굴용 컴퓨터에도 AI 칩셋에 사용되는 그래픽처리장치(GPU)가 들어가죠. 이 GPU를 설계해 TSMC에 주문하는 곳이 바로 소프고입니다.

비트메인은 2021년 대만에 위장 헤드헌팅 기업을 설립해 대만 반도체 기술자들을 몰래 채용했다가 대만 검찰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어요.

TSMC는 이번에 발견된 반도체가 화웨이가 제재 시행 전에 대량으로 비축한 제품인지를 살펴봤지만,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고 합니다. 소프고가 화웨이가 최근 설계한 반도체를 TSMC에 주문했다는 뜻이죠. 닛케이 아시아는 업체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채 “TSMC가 최소 중국 기업 2곳에 대한 거래를 중단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TSMC의 로고. /로이터 연합뉴스

◇“월급 3배 준다” 대만 기술자 확보 혈안

화웨이는 TSMC 출신 기술자 빼내기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해요. 프랑스 일간 르 몽드는 11월1일 “화웨이가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 대만 반도체 기술자 영입에 나서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은 “클로에 첸이라는 43세의 대만 반도체 패키징 전문가는 3개월에 한 번씩 화웨이의 위임을 받은 헤드헌팅 업체로부터 이직 제안 이메일을 받는다”면서 “월급을 3배로 올려주겠다고 하지만 기존에 몸담은 회사의 상업 기밀을 유출하는 일이라 아예 응답을 하지 않고 있다”고 했어요. 이 전문가는 TSMC 출신으로 지금은 대만 내 한 미국 기업에 근무한다고 합니다.

IT매체 폰아레나도 “화웨이가 미국의 제재를 뚫고 첨단 반도체 칩을 제조하기 위해 헤드헌팅업체를 통해 TSMC 기술자들을 접촉하고 있다”고 보도했어요. 화웨이는 3배의 연봉을 제시하고 있지만, TSMC 기술자들로부터 거절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프랑스 일간 르 몽드는 11월1일 화웨이가 대만 TSMC 출신 반도체 기술자들에게 현재 월급의 3배를 제시하며 이직을 제안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르 몽드 캡처

◇“자체 개발 자랑하면서 기술 훔치고, 인재 빼내가”

화웨이는 반도체 설계 능력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직접 제조는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반도체 제조 분야에도 뛰어들 준비를 한다고 해요. 광둥성 선전 북쪽 룽화구 주룽산공단에 50만㎡ 규모의 제2 본사를 짓고 있는데, 이곳에 반도체 제조 시설이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대만 주간지 상업주간이 보도했습니다. 중국 내 다른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는 대만 기술자들도 선전으로 속속 옮겨오고 있는데, 그 수가 부족해 대만에서 인력을 추가로 빼내려는 것이라고 이 주간지는 전했어요.

미국도 이런 상황에 대비해 작년 6월 우리나라와 대만, 일본 지역의 수출 통제를 담당하는 미 상무부 산업안전국(BIS) 소속 통제관을 주대만대표부 격인 미국재대만협회(AIT)에 파견했고, 올해는 매튜 보먼 BIS 담당 부차관보가 대만을 찾아 대만 반도체 업계 고위인사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은 미국의 제재망에 구멍이 적잖다는 우려를 낳았지만, 답답한 중국의 현실도 잘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와요. 입만 열면 자체 연구개발, 반도체 자립을 외치지만 사실은 뒷구멍으로 기술 훔치고 인재 빼내는 데 더 열심이었다는 겁니다.

대만 주간지 상업주간은 11월7일 중국 광둥성 선전 주룽산 인근에 짓고 있는 화웨이 제2본사에 반도체 생산시설이 들어설 것이라고 보도했다. /상업주간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