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나발니(44)는 ‘푸틴의 최대 정적(政敵)’으로 불리는 러시아 야권의 구심점이다. 한마디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는 눈엣가시다.

노비촉의 영향

나발니는 지난달 20일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국내선 여객기에 탑승하기 직전 공항에서 차(茶)를 한 잔 마셨다. 기내에서 나발니가 독극물 중독 증세로 의식을 잃으면서 여객기는 예정에 없던 곳에 급히 착륙했다. 나발니는 응급 치료를 받았지만 러시아 당국의 독살 시도 의혹이 불거졌다. 독일의 한 인권단체가 러시아로 앰뷸런스 비행기를 띄웠고, 이틀 후 나발니는 이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이후 2주 가까이 나발니는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독일 정부는 그의 몸속에서 치명적 독극물인 노비촉이 발견됐다고 2일(현지 시각) 밝혔다. 슈테펜 자이베르트 독일 총리실 대변인은 이날 “나발니 몸에서 노비촉 계열의 화학물질이 사용됐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입증됐다”고 했다.

노비촉은 2018년 러시아가 영국으로 귀화한 이중간첩 세르게이 스크리팔(69)을 독살하려고 시도할 때 사용하면서 대중에 널리 알려졌다. 스크리팔은 1990년대 러시아군 정보요원으로 유럽에서 근무하던 중 영국 정보기관 MI6에 포섭돼 이중간첩으로 활동하다 영국에 귀화한 인물이다. 런던 남부 솔즈베리에 살던 스크리팔과 딸 율리아(36)는 2018년 3월 외출했다 돌아오면서 자택 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노비촉에 중독됐다. 러시아 정찰총국 소속 요원들이 사전에 노비촉을 문 손잡이에 묻혀 놓았던 것이다. 스크리팔 부녀는 사경을 헤매다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알렉세이 나발니와 가족. /AP 연합뉴스

2년 만에 다시 러시아 당국이 노비촉을 사용했다는 소식에 서방 각국은 일제히 러시아를 성토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나발니는 독극물을 사용한 살인 미수의 희생자”라며 “러시아 정부가 꼭 대답해야 하는 심각한 의문”이라고 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충격적인 일”이라고 했다. 미국도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 명의로 성명을 내고 “전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2년 전 스크리팔 독살 시도 때는 서방과 러시아 간에 험악한 외교 분쟁이 벌어졌다. 당시 서방 진영에서는 모두 26국에 걸쳐 140여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했다. 러시아도 똑같이 맞대응해서 26국을 상대로 140여명을 추방했다. 당시 영국과 러시아 관계는 살얼음판으로 얼어붙었다.

다만 이번은 2년 전 스크리팔 사태와는 상황이 달라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2년 전에는 영국 땅에 러시아 정보요원들이 몰래 잠입해 영국 국적자가 된 스크리팔을 독살하려고 했다. 주권 침해가 명백했다는 점에서 영국과 서방이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이번에는 러시아 땅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서방이 전면적인 외교 분쟁으로 끌고 가기에는 다소 명분이 약할 수 있다.

게다가 러시아와 독일은 ‘노르트스트림2’라는 양국 간 가스관 건설 사업의 완공을 코앞에 두고 있다. 러시아는 천연가스를 유럽에 팔아 수익을 챙기고, 독일은 안정적인 대체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대형 국책사업이다. 이를 의식한 듯 메르켈 총리는 “나발니 사건과 노르트스트림2 추진은 별개”라고 했다.

러시아는 노비촉이 발견됐다는 독일의 발표에 대해 “나발니를 (독일에 보내기 전에) 검사했을 때 독극물 반응이 안 나왔다”며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2년 전 스크리팔 사건 때 오리발을 내밀며 영국과 정면충돌했던 것에 비해서는 대립각을 강하게 세우지 않고 있다. 푸틴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번 문제에 대해 독일과 정보 교환 및 협력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