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현지 시각) 지중해에 있는 프랑스 휴양지 코르시카섬의 한 고급 리조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중심으로 EU(유럽연합)에서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일곱 나라 정상들이 한 테이블에 모였다.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몰타·키프로스로 구성된 이른바 ‘메드세븐(Med7)그룹’의 정상 회의다. EU 내 ‘지중해 소모임’ 성격을 지닌다.

이날 Med7 정상 회의는 최근 지중해 섬나라 키프로스 인근 해역의 천연가스 개발을 놓고 갈등이 폭발한 그리스와 터키의 분쟁을 둘러싸고 그리스를 지원하자는 마크롱의 제안으로 열렸다. 마크롱은 “더 이상 터키를 동(東)지중해의 파트너로 인정할 수 없다”며 “터키에 좀 더 단호한 유럽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이에 터키 외교부는 “식민주의자의 오만한 대응”이라고 비난했다.

이번 Med7 정상 회의는 최근 지중해를 무대로 부쩍 영향력을 키우고 싶어 하는 마크롱의 열망이 반영된 모임이다. 이날 마크롱은 트위터에 ‘지중해에 의한 평화(Pax Mediterranea)’라는 말을 띄웠다. 하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공보수석은 이날 트위터에 “마크롱이 나폴레옹이 되고 싶은가 보다”라고 썼다. 마크롱이 Med7 정상 회의를 개최한 코르시카섬은 나폴레옹의 고향이다.

Med7그룹 정상 회의에서 마크롱 대통령./AP 연합뉴스

마크롱은 키프로스 인근 해역의 천연가스 개발을 놓고 터키와 영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그리스를 돕겠다며 지난달 공격용 헬기를 실은 강습 상륙함 토네르호와 라팔 전투기를 동지중해에 배치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참여를 이끌어내 프랑스·이탈리아·그리스 해군의 공동 해상 훈련을 실시하며 터키를 압박했다. 마크롱은 또 8월 초 대규모 폭발 사고로 쑥대밭이 된 레바논에 한 달 사이 두 차례 찾아가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마치 ‘지중해의 골목대장’을 자처하고 나선 모습이다.

그의 이런 행보는 그리스·터키 분쟁을 계기로 유럽의 이익을 수호하는 리더로서 면모를 보여줄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은 동지중해에서 노골적으로 영향력 확대를 노리며 유럽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에르도안은 그리스를 위협해 키프로스 인근의 천연가스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 그뿐 아니라 내전(內戰)을 벌이고 있는 리비아에서도 같은 이슬람 세력인 통합 정부를 지원하고 있다. 과거 튀르크 민족의 전성기를 열었던 오스만제국처럼 북아프리카에서도 영향력을 키우고 싶어하는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가운데) 프랑스 대통령이 10일(현지 시각) 지중해 코르시카섬의 리조트에서 열린 ‘메드세븐(Med7)그룹’ 정상회의에서 참석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메드세븐그룹은 지중해에 있는 EU 소속 7국의 모임이다. 이날 마크롱은 “더 이상 터키를 동(東)지중해의 파트너로 인정할 수 없으며, 단호한 유럽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 마크롱 대통령,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디스 키프로스 대통령,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 로버트 아벨라 몰타 총리. /AFP 연합뉴스

마크롱이 지중해를 무대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건 터키와 손잡고 역시 지중해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다.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얻은 성과로 2015년부터 지중해 연안의 시리아 타르투스항에 해군 병력을 배치해놓았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작년부터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시리아·이라크에 주둔하던 미군 병력을 철수하고 있다”며 “미국이 지중해 일대에서 더 이상 분쟁 중재자 역할을 하지 않게 된 것도 마크롱이 부각되는 이유”라고 했다. 지중해에서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독일과 영국이 목소리를 키우기 어렵기 때문에 마크롱이 골목대장을 하기에 수월하다.

프랑스 정치권에서는 마크롱이 코로나 방역 실패로 나빠진 국내 여론을 뒤집고자 지중해를 반전 카드로 삼으려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중해의 나폴레옹’이라는 이미지를 프랑스인들에게 전달해 과거 식민지를 거느리던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지중해를 둘러싼 최근의 정세에 프랑스의 막대한 경제적 이익이 달려 있다는 점도 마크롱이 부지런히 뛰는 이유 중 하나다. 키프로스 인근 해역의 천연가스 개발을 주도하는 다국적 컨소시엄의 핵심 업체가 프랑스 최대 에너지 기업 토탈(Total)이다.

EU는 오는 24일부터 이틀간 EU 정상 회의를 열어 터키에 대응할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일간 르피가로는 “Med7 정상 회의에 이어 EU 정상 회의에서도 마크롱이 주도권을 잡으려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