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사회 운동가 옐레나 칼리니나가 만든 반(反)정부 시위 눈사람들. /옐레나 칼리니나 VK 캡처

추위의 나라 러시아에선 눈사람도 시위를 할 수 있다. 단, 이조차도 푸틴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13일(현지 시각) 러시아의 소셜네트워킹서비스 브콘탁테(VK)에선 러시아 북서부 한 마을의 눈사람들 사진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달 말 올라온 이 4개의 눈사람 사진엔 현재까지 4000개가 넘는 ‘좋아요’가 눌리고, 수백개의 응원 댓글이 줄줄이 달리고 있다.

이 같은 인기를 누리기엔 눈사람들의 외관은 지나치게 평범하다. 눈뭉치로 몸통을 만들고 주변 나뭇가지로 팔다리와 얼굴을 인간처럼 꾸민 평범한 눈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눈사람들이 유독 사랑을 받은 건 이들이 목에 걸고 있는 종이박스로 된 팻말 때문이다. 이들이 각기 들고 있는 팻말엔 “꺼져라 차르” “이건 우리의 나라다” “오막살이엔 평화를, 궁전엔 전쟁을”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러시아 사회 운동가 옐레나 칼리니나가 만든 반(反)정부 시위 눈사람. "꺼져라 차르(옛 러시아의 황제)"라고 적힌 팻말을 걸고 있다. /옐레나 칼리니나 VK 캡처

이 팻말들 속 ‘차르’란 단어는 옛 러시아 황제를 가리키는 러시아어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암시한다. ‘궁전’은 푸틴의 최대 정적(政敵)인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지난달 중순 폭로한 푸틴 소유로 알려진 거대 호화 저택을 뜻한다. 이 저택과 부지의 값어치는 11억유로(1조4700억원)에 이르고 부지는 7800헥타르(2359만평)에 달해 모나코 국토의 39배에 달한다. 즉, 이들은 푸틴을 겨냥한 반(反)정부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 속 광경을 더는 실물로 볼 수 없다. 최근 현지 경찰이 이 눈사람 제작자를 구금하고, 눈사람들에게서 팻말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러시아 모스크바타임스에 따르면 제작자는 아르한겔스크주(州) 홀모고르스키군(郡)의 한 마을에 사는 옐레나 칼리니나라는 사회 운동가다. 그는 지난달 26일 자신의 주택 인근에 직접 눈사람을 만들어 팻말 시위를 벌이는 사진을 브콘탁테에 찍어 올렸다. 이 사진은 게시되자마자 화제를 모았다.

러시아 사회 운동가 옐레나 칼리니나가 만든 반(反)정부 시위 눈사람들. /옐레나 칼리니나 VK 캡처

사진을 올린 지 단 하루 만에 이 제작자는 체포됐다. 나발니의 아르한겔스크주 사무실 전 근무자인 안드레이 보로비코프는 이날 트위터에 “옐레나 칼리니나는 눈사람으로 대중 집회를 조직한 혐의로 체포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경찰들도 (이 눈사람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더 높은 사람들한테 전화를 걸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현지 경찰들은 곧 눈사람의 팻말을 모두 뜯어 해체했다. 러시아 정부는 코로나 확산 위험을 이유로 모든 지역 집회를 불허하고 참가자들을 처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러시아 사회 운동가 옐레나 칼리니나가 만든 반(反)정부 시위 눈사람. "이건 우리의 나라다"라고 적힌 팻말을 걸고 있다. /옐레나 칼리니나 VK 캡처

눈사람 시위는 끝났지만 브콘탁테·트위터 등에선 여전히 응원 댓글이 달리고 있다. 한 러시아인 네티즌은 “봐라. 러시아에선 눈사람도 시위를 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슬프게도 이조차 우리 볼로쟈(푸틴 이름 블라디미르의 애칭)의 허락을 맡아야만 가능한 일이다”는 댓글을 남겼다.

한편 러시아 전역에선 지난달 17일 나발니가 모스크바로 귀국해 체포된 이후 주말마다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당국이 시위대에 곤봉을 휘두르고 매주 1000~5000명에 달하는 시위대를 잡아들이는 등 강경 진압 의지를 보이자 시민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 온 나발니의 아내 율리아도 10일 체포를 피해 독일로 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사회 운동가 옐레나 칼리니나가 만든 반(反)정부 시위 눈사람. “오막살이엔 평화를, 궁전엔 전쟁을”이라고 적힌 팻말을 걸고 있다. 여기서 '궁전'은 최근 푸틴의 정적 나발니가 폭로한 푸틴 소유로 알려진 호화 저택을 암시한다. /옐레나 칼리니나 VK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