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현지 시각) 영국 런던의 금융 허브 시티오브런던의 한 양복점에 폐업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이해인 특파원

‘42년 동안 시티에 있었어요. 이제 우리는 문을 닫아야만 합니다.’

지난 10일 오후(현지 시각) 영국 런던 금융 특구 시티오브런던(시티)의 한 양복 전문점 쇼윈도에는 이 같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충격에 이어 코로나 재택근무로 50만명에 이르던 출퇴근 인구가 사라지자 이 지역 상권이 무너진 데 따른 단면이다. 작년 초만 해도 밀물·썰물처럼 오가던 검은색 정장의 직장인은 거의 보기 어려웠다. 불과 1년 만에 상황이 최악으로 변한 것이다. HSBC, 바클레이스, 블랙록 같은 글로벌 금융회사 건물 1층엔 경비원 한두 명이 자리를 지킬 뿐, 사무실이 포진해 있는 2층부터는 불이 꺼져 있었다. 거리 곳곳엔 임대 광고를 뜻하는 ‘TO LET(세 있음)’ 표시가 가득했다.

10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의 금융 중심가 시티오브런던의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는 모습. 코로나 이후 기업들의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시티오브런던 거리가 한산해졌다. /이해인 특파원

시티는 대변신을 꾀하고 있다. 빈 사무실을 주택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시티 정부는 지난달 말 “코로나 이후 기업의 기능 변화 추세를 반영하고자 도심 운영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며 “빈 사무실과 빌딩을 개조해 오는 2030년까지 주택 1500가구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이 정도 물량은 시티로선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다. 오피스 특화 지역인 이곳의 주거용 부동산은 모두 7850가구에 불과하다. 이번에 새로 공급되는 주택 물량은 기존의 20%에 달한다. BBC 등 현지 언론도 잇따라 “코로나가 전 세계 금융의 심장과도 같은 곳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시티의 결정이 알려지자 영국 전역이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면적이 1평방마일(약 2.9㎢)에 불과해 스퀘어마일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손톱만 한’ 크기의 이 지역이 갖는 역사성과 특수성 때문이다. 영란은행뿐 아니라 스탠더드차타드, 프루덴셜, 아비바 등 세계적인 금융회사의 본사가 자리한 세계 금융의 허브와도 같은 곳이다. 면적은 서울시에서 가장 작은 자치구인 중구(9.9㎢)의 3분의 1 정도지만 2만4000곳이 넘는 회사가 이곳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이 회사들이 내는 세금이 2019년 기준 약 755억파운드(약 120조원)로 같은 해 서울시 전체 세입(45조6000억원)의 거의 3배에 가깝다.

시티오브런던

대표적인 오피스 타운인 시티가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영국 직장인의 근무 환경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회계법인 KPMG는 1주일에 이틀만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나머지 시간은 집이나 고객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고 지난 6일 발표했다. 세계적인 금융회사 네이션와이드는 영국 직원 1만3000명이 회사 밖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발표하고 사무실 3곳을 폐쇄한다고 밝혔다. 이 회사 조 가너 CEO는 “우린 이제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어디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일간 텔레그래프는 10일 “최근 직원들이 사무실로 복귀하는 미국과 달리 HSBC와 같은 영국 기업들은 유연한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사무실 공간을 줄이려 한다”고 밝혔다.

시티 변신은 올 초 완결된 브렉시트가 첫 방아쇠를 당겼다. 로이터는 지난달 한 싱크탱크의 연구 보고서를 인용해 영국의 400곳 넘는 금융회사가 브렉시트 이후 사무실 혹은 인력을 EU로 옮겼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자리 7400개, 1조파운드(약 1590조원)가 런던을 떠났다. 비싼 임대료도 사무실 축소에 영향을 미쳤다. 시장 및 통계 전문 회사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런던의 사무실 임대료는 유럽 최고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 사태가 겹치면서 시티의 경쟁력이 급속히 떨어진 것이다.

이번 시티 결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도시의 성공은 비즈니스가 한곳에 모여 있다는 이점을 기반으로 한다”며 “사무실에서 주거 공간으로 전환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비판했다. 재택근무가 확산하고 있는 마당에 사람들이 오피스 타운으로 거주하러 들어올 것이란 보장도 없다. 시티 내 주거용 건물 임대료는 원룸 1600파운드(약 250만원), 침실 하나 딸린 아파트는 2000파운드(약 300만원)로 런던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