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프란치스코 교황(오른쪽)이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을 접견했다. 올리브 가지를 입에 문 비둘기상은 블링컨이 교황에게 건넨 선물이다./AP 연합뉴스

28일(현지 시각) 유럽을 순방 중인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바티칸의 사도궁전을 찾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서였다. 교황과 블링컨은 비공개로 40분간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기후변화, 난민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 교황은 국가 정상이 아닌 사람과는 잠깐 덕담을 나누는 정도의 만남만 가진다. 블링컨 접견에 이례적으로 40분을 할애한 것은 교황이 그를 얼마나 반겼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 미 행정부 시절 기후변화, 난민 문제 등에서 바티칸과 미국은 정면 충돌했다. 교황이 작년 9월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 국무장관의 접견을 거부한 것과는 180도 달라졌다.

교황은 이날 블링컨에게 “2015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인들의 환대가 고마웠다”고 회상했다. 당시는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었고 부통령이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이었다. 블링컨은 알현 직전 교황청 간부들의 안내를 받고 혼자 시스티나 성당 내부를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를 두고 AP통신은 “블링컨이 VIP 대우를 받았다”고 했다. 블링컨은 알현 직후 기자회견에서 “말할 수 없이 따뜻한 만남이었다”고 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유럽 순방

23일부터 일주일에 걸친 블링컨의 유럽 순방은 이례적으로 주목받았다. AP통신은 “유럽 정상들이 블링컨에 대해 열광적으로 환호하고 있다”며 “그를 록스타처럼 대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불화를 겪은 미국과 유럽 관계를 블링컨이 대부분 복구시킨 것이다. 특히 중국에 맞선 서방의 공조 체제 구축이라는 이번 순방의 가장 큰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블링컨은 특히 방문한 국가에 맞춰 ‘맞춤형 외교'를 벌여 호평받았다. 23일 베를린을 맨 먼저 방문한 블링컨은 유럽의 ‘맏형’인 독일로부터 러시아, 중국에 맞서 미국과 같은 길을 걷자는 약속을 이끌어냈다. 그다음 파리에 찾아간 블링컨은 유럽에서 중동 문제에 가장 적극적인 프랑스를 상대로 이란 핵 협상과 관련해 긴밀히 공조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로마에선 G7(주요 7국) 국가 중 가장 친중(親中) 성향이 뚜렷했던 이탈리아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루이지 디마이오 외무장관은 “중국과의 상업적인 관계보다 미국·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의 동맹 관계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바티칸을 방문한 토니 블링컨(왼쪽) 미 국무장관이 28일(현지 시각) 프란치스코 교황과 악수하고 있다. 교황은 국가 정상이 아닌 사람과는 짧은 인사만 주고받고 헤어지지만, 블링컨과는 이례적으로 40분간 마주 앉아 기후변화, 난민 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대화했다. AP통신은 블링컨이“VIP 대우를 받았다”고 전했다. /EPA연합뉴스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은 “미국이 다시 우리 편으로 왔다”고 했고, 장 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은 “미국이 우리와 함께 구축한 다자주의로 복귀했다”고 반겼다. 블링컨의 이번 순방은 지난 11~15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G7 정상회의, 나토 정상회의, 미국·EU 정상회의에 잇따라 참석해 유럽과 화해의 물꼬를 튼 이후 실무 단계에서 협력을 구체화했다는 성격을 갖고 있다.

블링컨은 세심하고 치밀하게 접근해 유럽인들의 마음을 두루 얻었다. 베를린에서 블링컨이 “독일보다 나은 친구가 없다”고 한 것은 그를 향한 독일 사회 일각의 의구심을 허물었다. 블링컨은 아홉 살 때부터 고교 졸업 때까지 파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친불파 아니냐”는 말을 듣는다. 뉴욕에서 태어난 블링컨은 아홉 살이던 1971년 파리로 전학을 갔다. 블링컨의 친부와 이혼한 어머니가 폴란드계 미국인 변호사인 새뮤얼 피자르와 재혼했고, 피자르가 자신이 활동하던 파리로 블링컨을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독일을 치켜세운 블링컨은 파리에 가서는 장 이브 르드리앙 외무장관과 유창한 프랑스어로 대화했고, 이 장면을 프랑스 언론이 집중 보도했다. 교황을 알현하고서는 ‘교황 성하(his holiness)’라는 극존칭을 써서 가톨릭 교단과 미국의 불편한 관계를 대번에 해소했다. 블링컨은 10대를 유럽에서 보낸 덕분에 유럽인들의 정서를 꿰뚫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미국이 유럽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성과가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직은 일방통행을 했던 트럼프 행정부가 사라진 데 따른 ‘반사 이익’을 누리는 시기이기 때문에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맞대응하기 위해 바이든 대통령이 제안한 글로벌 인프라 구축 계획인 ‘더 나은 세계 재건(B3W)’은 아직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제임스 린지 미 외교협회(CFR) 부회장은 뉴욕타임스(NYT)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끝내느냐는 것”이라며 “바이든 대통령은 유럽인들로부터 말(words)을 얻었지만, 아직 행동(deeds)을 얻지는 못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