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주 거처인 런던 버킹엄궁 뒤편엔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비밀 정원’이 있다. 1608년 제임스 1세가 뽕나무를 심으며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정원은 면적이 14만5686㎡(약 4만4000평)로 런던에서 가장 큰 개인 정원이다. 세계에서 가장 바쁜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런던에서 허파와 같은 역할을 해서 그런지 이곳엔 ‘담장에 둘러싸인 런던 한복판의 오아시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45종의 뽕나무를 가진 국립 뽕나무 컬렉션을 비롯해 총 1000그루의 나무, 325종의 야생화가 살고 있다고 한다.
오랜 기간 동안 오직 영국 왕실에게만 속살을 허용했던 이 정원이 지난 9일부터 약 두 달간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여왕의 꽃과 나무를 감상하고 잔디에서 맘껏 피크닉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1952년 여왕 즉위 후 약 70년 만에 처음이라고 영국 언론이 보도했다. 영국 왕실은 매년 여름 버킹엄궁을 대중에 공개했다. 하지만 작년과 올해 코로나 팬데믹으로 왕궁 공개가 취소되자 대신 이 비밀의 정원을 개방한 것이라고 왕실 측은 밝혔다.
입장 티켓은 성인 1인당 16.5파운드(약 2만6000원)인데 이미 9월까지 모두 매진됐다. 며칠간 홈페이지를 검색해 가까스로 취소표 한 장을 얻었다. 영국인들의 정원 사랑은 유별난 것으로 유명한데, 여왕의 정원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10일 오후(현지 시각) 호기심을 가득 안고 이 정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정원엔 먼저 온 시민들이 마치 왕실의 일원이 된 듯 여유롭게 산책을 하거나 자리를 깔고 앉아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집에서 직접 만든 스콘과 과일을 싸왔다는 니나(38)와 셰릴(38)씨는 “잔디밭 한가운데 앉으니 주변에 높은 빌딩 하나 눈에 걸리지 않는다. 런던에 이런 경치가 있는 줄 상상도 못했다”며 “여왕의 뒷마당을 차지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탁 트인 잔디밭을 가로질러 동백나무가 늘어선 산책로에 들어서자 새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왕실 직원은 “청딱따구리, 어치 등 매년 50종 이상의 새가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산책로 곳곳엔 ‘조지 5세와 메리 여왕의 결혼 20주년’과 같은 팻말이 붙은 나무가 보였는데 이 중 가장 유명한 나무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공의 플라타너스 나무 두 그루다. 왕실 직원은 “150년 넘게 이 정원에서 왕실 부부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며 “이 정원은 왕실 가문의 역사와 함께한다”고 말했다.
새소리를 들으며 ‘여왕의 길’이라 불리는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다년초 화단이 나왔다. 156m에 달하는 화단에 흰 옥잠화, 빨간 양지꽃, 푸른 패랭이꽃 등 알록달록한 꽃들이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1900년 이후 다른 런던 지역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금난초 같은 토착식물을 포함해 300종이 넘는 야생화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수석 정원사 마크 레인은 지난 4월 펴낸 책에서 “여왕이 버킹엄궁에 머무르는 기간이면 정원사들이 매주 여섯 송이의 꽃을 골라 여왕의 서재 책상에 꽂아 놓는 전통이 1992년부터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한가운데에 자리한 1만4163㎡(약 4284평) 크기의 호수는 정원의 운치를 한층 깊게 만드는 듯했다. 앨버트공이 결혼 1년이 지난 1841년 초 이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다 익사할 뻔했는데 아내 빅토리아 여왕이 몸을 던져 구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멀리 호수 뒤편으로 목재 벌집통이 보였다. 왕실 직원은 “2008년부터 양봉을 하고 있는데 매년 약 160병의 꿀이 생산된다”며 “여왕 식탁에 올라가는 꿀”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