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사고를 당해 39년간 식물인간으로 살아온 프랑스 축구 선수가 결국 숨졌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목숨을 유지한 배경에는 52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다.
일간 르피가로는 6일(현지 시각) 프랑스 국가대표 선수였던 장-피에르 아담스가 이날 73세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아담스는 1982년 3월 무릎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중부 도시 리옹의 한 병원을 찾았다. 수술을 위해 전신 마취를 했다가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당시 의료진은 병원 파업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수술을 강행했다. 마취과 의사 대신 수련의가 폐에 삽관이 제대로 되지 않은 아담스에게 마취제를 투입했다. 기관지가 경련을 일으켜 뇌에 산소가 모자라게 돼 의식불명 상태가 됐다.
아담스는 이후 39년 세월을 아내 베르나데트에게 의지해 목숨을 유지했다. 15개월 동안 입원했지만, 회생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진단이 내려지자 베르나데트는 남편을 남부 도시 님의 자택으로 데려가 지금까지 살았다.
베르나데트는 매일 오전 7시에 일어났다. 음식을 아담스의 입안으로 흘려줬다. 대소변을 받고 목욕을 시켜줬다. 면도도 대신 해줬다. 아담스가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베르나데트는 끊임없이 말을 건네며 대화를 시도했다. 매일 다른 옷을 입혔고 향수를 뿌려줬다. 휠체어에 앉혀 산책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두 아들을 키웠다. 그는 “드문 경우지만 멀리 외출해야 할 일이 있어 간병인을 부르면 남편은 미묘하게 내가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걸 느끼는 것처럼 몸이 반응한다”고 말하곤 했다.
베르나데트는 생일, 크리스마스, 아버지의 날이 되면 매년 남편에게 선물을 건넸다. 그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이 내가 할 만큼 했다며 이제는 인공호흡기 코드를 뽑아버리라고 했지만 남편은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아담스는 의식은 없어도 호흡은 스스로 할 수 있었다. 베르나데트는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혹시나 의술이 발전해 의식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을 갖고 살아왔다”며 “혹시나 내가 먼저 죽으면 남편은 어떻게 될까 늘 걱정하며 지낸다”고 했다.
베르나데트는 아담스가 스물한 살 때인 1969년 결혼했다. 아담스가 축구 선수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이전이다. 그때부터 52년간 두 사람은 늘 함께였다. 결혼 초기는 프랑스에 흑인 축구 선수가 드물었던 시절이다. 흑백 커플도 흔하지 않았다. 베르나데트는 인터뷰에서 “흑인 남편을 뒀다는 이유로 젊은 시절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며 “솔직히 인종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세네갈에서 태어나 열 살 때 프랑스로 이주한 아담스는 프랑스 리그에서 중앙 수비수로 활동했다. 1972년부터 4년간 프랑스 국가대표로도 활동하며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22경기에 출전했다. 다부진 체격을 앞세운 탄탄한 수비로 별명이 ‘검은 경비원(garde noir)’이었다.
베르나데트는 “병원에서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며 불만을 표시해왔다. 아담스를 의식불명에 빠뜨린 마취과 의사와 수련의는 1990년대 중반에야 유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각각 1개월 자격정지와 750유로(약 103만원) 벌금형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