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안보 등 각종 현안에서 서방과 대립해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세적인 대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4일(현지시각) 크림반도 내 항구도시 세바스토폴에서 열린 ‘국민 화합의 날’ 행사를 주재했다. 푸틴은 이날 연설에서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은 러시아와 함께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며 “이것은 주권과 자유, 타협하지 않는 우리 모두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4일(현지 시각) ‘국민통합의 날’을 맞아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에 있는 러시아 내전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 2014년 당시 우크라이나 땅이었던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한 후 이 동상을 만들었다. /AP 연합뉴스

국민 화합의 날은 17세기 러시아의 대외 항쟁을 기념해 제정된 공휴일로 열병식 등 애국심을 고취하는 행사들이 개최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친러·반러 세력 간 내전이 격화하던 2014년 3월 친러 성향 주민이 다수 거주하던 우크라이나 영토 크림반도에 병력을 보내 장악한 뒤 자국 영토로 강제 편입했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들은 “국제법 위반”이라며 러시아의 점유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제재도 가했다. 이 때문에 푸틴의 행보는 국제사회의 비판과 제재에 개의치 않는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으로 풀이됐다.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지대에 각종 군사 장비와 9만 명의 병력을 증강했다고 CNN 등이 보도했다.

이날 연설하는 푸틴 뒤로 최근 건립된 거대한 두 남성의 동상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 내전(1917~1922년) 때 서로 싸웠던 러시아 내 세력이 ‘어머니 러시아’의 호소로 화해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동상이다. 받침대에는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고, 오직 하나의 러시아만 있을 뿐’이라는 문구가 있다. 실제 푸틴은 옛 소련 시절 강대국의 부활을 목표로 구 소련권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푸틴은 지난 9월에는 구 소련권의 친러 국가인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과 만나 통합국가 창설 방침을 발표했다. 러시아는 지난달에는 역시 옛 소련권 국가 타지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 정정 불안에 대비한다는 취지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연합 군사훈련을 가졌다.

푸틴의 최근 행보는 거침이 없다. 크림반도 행사 전날인 3일에는 각료 회의를 주재하면서 “극초음속 미사일을 내년부터 실전 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보도했다. 푸틴은 “잠수함과 수상함에서 쏜 미사일이 지상과 해상 표적 타격에 모두 성공했다”고도 말했다.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저항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푸틴과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은 일도 화제가 됐다. 지난달 소치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무라토프가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은 스파이를 뜻하는 ‘외국 대리인’으로 지정되고 있는데, 우리는 외국 대리인인가”라고 묻자 푸틴은 “(정부는) 외국에서 자금 지원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다”며 제재 방침을 정당화했다. 그러면서도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한다”고 말하며 포용적인 모습도 보였다.

지난해 개헌으로 종신 대통령의 길을 닦은 푸틴은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 코로나 확진자 급증, 정적(政敵) 알렉세이 나발니 탄압에 따른 국제사회의 비난 등의 악재가 있지만, 권력 누수의 징후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는 평가다. 따라서 거침없는 그의 행보는 장기 집권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라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