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副)장관과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이 10일 제네바에서 시작한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협상에서 최대 쟁점은 ‘나토(NATO)의 동진(東進)’이다. 러시아는 미국과 서방이 30년 전 독일 통일(1990년 10월) 때 “나토는 1인치도 동쪽으로 확장 안 한다”고 해놓고 계속 어겼다고 주장한다. 나토는 통독(統獨) 이후 5차례에 걸쳐 구(舊)소련권의 중‧동부 유럽국가 14개국을 새로 받아들였다. 푸틴이 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인 10만 명을 유럽 전선에 배치하고 나선 것도 이 주장에 근거한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약속을 한 적도 없고, 당시 관련 협정에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고 반박한다. ‘1인치 나토 확장 불가’를 둘러싼 엇갈린 주장의 진실은 무엇일까.
양(兩)진영이 맺은 어느 협정‧조약에도 이런 문구가 명문화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 언론의 분석,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 등 당시 국가 지도자들의 증언을 보면 서방 측은 “통독 후 나토는 러시아 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했다. 푸틴은 이를 토대로, ‘배신’ 운운하며 군사적 위협을 통해 30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겠다는 것이다.
◇“1인치도 나토 동진 안 한다” 주장 왜 나왔나
1990년 서방과 소련은 독일 통일에 합의했지만, 여전히 동독 지역엔 38만 명의 소련군이 있었고 소련의 광범위한 법적 이해관계가 존재했다. 서방으로선, 독일 통일 이후에도 나토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소련을 안심시켜야 했다. 그해 1월31일 한스-디트리히 겐셔 당시 독일 외무장관은 “동부 유럽의 변화와 독일 통일 과정은 결코 소련의 안보 이익을 해치는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며, 나토는 동쪽 소련 국경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2월9일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우리가 나토 일원인 독일에 미군을 배치하더라도, 나토 관할권(jurisdiction)은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나 나는 일방적인 이익을 취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나토 확대는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했고, 베이커는 “우리도 동의한다”고 화답했다. 고르바초프는 베이커로부터 이 ‘1인치 약속’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했다.
2017년 12월 이 대화록을 공개한 미 조지워싱턴대의 미 국가기록 분석에 따르면, 당시 미국‧영국‧독일프랑스 지도자들은 소련의 안보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비슷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때는 소련 해체(1991년 12월) 전이었지만, 서방 지도자들은 이미 중‧동부 유럽국가들의 나토 가입을 고려했고, 이를 배제하기로 했다. 부시 대통령은 1989년 12월 몰타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나 “(무너진)베를린 장벽 위에서 기뻐 날뛰지 않았다”며 소련의 이익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소련이 무너진 뒤에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존 메이저는 “우리는 나토의 확장을 거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1990년 독일 통일 최종 합의 문구에선 ‘나토 동진’ 쏙 빠져
그러나 베이커 국무장관의 “1인치 발언”은 미 백악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발언은 통독(統獨) 이후에도 나토의 관할권이 ‘동독 지역’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베이커는 5월 모스크바에서 “소련군이 동독에서 철수하는 동안(1994년), 나토군은 그 지역으로 진출하지 않겠다”고 슬쩍 바꿨다. 고르바초프는 그럼에도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체결하려는 문서는 어쨌든 통일 독일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이커는 2014년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가진 인터뷰에서 “1인치 발언은 잠시 운을 뗀 정도였는데, 푸틴이 협상 과정에서 나온 얘기를 근거로 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박했다. 당시 국가안보위원회(NSC)에서 소련‧동부유럽 담당 국장이었던 콘돌리사 라이스 전 국무장관은 뉴욕타임스에 “그때는 소련의 붕괴, 바르샤바조약기구 해체 이런 것이 모두 불분명한 시점이라, 나토 확장은 1990~1991년 의제에는 있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공개된 당시의 미 외교‧안보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 1990년 독일 통일 ‘최종 합의’ 문구 놓고 다른 해석
이 합의는 오로지 통일 독일의 지위에 관한 것이므로, 냉전 시절 소련 영향권에 있었던 국가들에 대한 언급은 당연히 없었고, “나토군의 동독 지역 활동을 허용한다”고만 명시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를 ‘독일의 동쪽’으로는 나토가 동진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당시 미 CIA 국장이었던 로버트 게이츠도 회고록에 “서방 지도자들이 계속 ‘동진 안 한다’고 발언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와 소련 수뇌부는 ‘나토 확장은 없을 것이라고 믿게끔’ 됐다”고 썼다.
◇ 옐친 이후 러시아 지도자, “나토 확장에 ‘거부권’ 있다” 억지 주장
그러나 1993년이 되면서 폴란드‧헝가리‧체코의 나토 가입이 논의 대상이 됐다. 미국과 나토, 러시아는 이 문제를 다루는 1997년 ‘나토-러시아 관계정립조례’를 체결했다.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1990년 통독 합의는 “나토 존(zone)을 동쪽으로 확장하는 선택권은 아예 배제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양 진영간에 오간 대화 문서록을 보면, 서방 지도자들은 고르바초프에게 ”바르샤바조약기구를 떠나는 나라 중 어느 나라도 나토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옐친은 따라서 “나토 확장에 대해 러시아가 거부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토 확장을 멈출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옐친은 국내 정적(政敵)들을 의식해, 마치 러시아가 ‘거부권’을 가진 것처럼 선전했다. 이는 이후 푸틴과 러시아 대중이 “계속 미국에 속고 있다”고 말하는 근거가 됐다. 푸틴으로서도 “러시아가 냉전 때의 위엄을 잃은 것은 소련 붕괴가 아니라, 서방의 거듭된 배신 탓”이라고 주장하는 게 국내에서 더 설득력이 있었다.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위협 안 한다’ 약속 어겨
1994년 러시아‧미국‧영국은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했다.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가 자국에 배치된 1900개의 러시아 핵탄두를 러시아로 보내는 대신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주권‧국경을 존중하고, 군사력 사용이나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14년 푸틴은 크림 반도를 강제 합병했고, 소속‧계급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녹색 군복의 러시아군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동부를 침공했다.
◇ “러시아 불안 덜어주고, 중국에 집중해야”
따라서 지금 푸틴과 러시아가 미국의 배신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미국‧서방과 러시아(소련) 지도자들 간에 1990대에 주고받은, 결코 명문화하지 못한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은 뒤에 “나토 확장은 1990년 우리에게 약속한 발언들의 정신에 분명히 위반되는 것이었다”고 했다. 존스홉킨스대의 냉전 역사학자인 메리 사로트는 “푸틴의 주장은 ‘왜곡된 기억’을 토대로 했지만, 러시아의 안보 우려를 다룰 필요는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했다. 그는 미국이 나토와 러시아 양측의 군사연습 회수를 제한하고, 중거리 미사일의 유럽대륙 배치를 금지하고, 러시아에게 서방측이 이런 약속을 지키는지 충분히 현장 방문해 확인할 수 있도록 제안하자고 했다.
물론 ‘우크라이나의 나토 배제’를 고집하는 푸틴이 이런 소극적 평화안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사로트 교수는 “이게 푸틴 세력에게 ‘군사적 침공이 불가피했다’는 구실을 주는 것보다는 낫고, 그래야 미국과 서방은 푸틴의 단기적 위험을 덜어내고 장기적으로 더 위험한 중국에 전략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