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한 시민단체 간사로 일하고 있는 이건희(36)씨는 작년 1월 우크라이나 국적인 아나스타샤(28)씨를 알게 됐다. 러시아에서 어학연수를 했을 당시 알게 된 러시아인 친구가 소개해줬다. 두 사람은 카카오톡 메신저를 통해 서로를 알아갔고, 이씨는 지난 1년여간 3차례에 걸쳐 비행기로 14시간이 걸리는 우크라이나로 날아가 연인과 사랑을 키웠다. 올해 설연휴 때 이씨는 우크라이나에 가 여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했고, 여자 친구와 가족들이 이를 승낙하면서 오는 5월 결혼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결혼을 언제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됐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 리비우의 아나스타샤(왼쪽)씨 자택에서 아나스타샤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이건희씨. /이건희씨 제공

이씨는 전쟁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나스타샤에게 ‘괜찮으냐’고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냈지만 한동안 답이 오지 않았다. 이씨는 1일 본지 통화에서 “제발 살아만 있어 달라고 기도하며 휴대전화만 붙잡고 있었다”고 했다. 이씨의 문자에 “괜찮다. 걱정 말라”는 답은 7시간이나 지나서 왔다고 한다.

약품회사에 다니는 아나스타샤는 이씨에게 “가족과 함께 군인들을 돕고 한국으로 가겠다”며 “지금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돕지만, 전쟁이 끝나면 한국으로 날아가 손을 잡아주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여자친구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씨도 처음에는 예비 신부에게 수차례 피란을 권유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가족 곁에 남았다. 아버지가 국가 총동원령 대상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씨는 “여자 친구는 어머님과 같이 헝가리 쪽으로 피란할 수 있었고, 아버님도 피란을 권유했다고 한다”면서 “하지만 여자 친구가 가족과 같이 있고 싶다면서 거절했다”고 전했다.

아나스타샤는 현재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의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다. 폴란드 국경과 가까운 리비우는 전쟁 지역의 후방에 있으나, 현재 아나스타샤 거주지 주변 마트의 생필품은 대부분 품절됐다고 한다. 이씨는 “여자 친구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혹시 러시아인들이 주변 아파트 옥상에 어떤 표시를 해놓지 않았는지 감시할 계획이라고 했다”며 “이 표시가 있으면 파괴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이씨는 요즘 아나스타샤가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 이야기 등을 많이 해준다고 한다. 이씨는 “여자 친구는 전쟁을 겪으며 고통받는 만큼, 저와 얘기하는 순간만이라도 전쟁을 잊고 웃을 수 있도록 즐거운 얘기를 해주려고 한다”면서 “전쟁이 끝난다면 너무 고생했다며 꼭 안아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