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의 정보당국은 종종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67)을 체스판에서 여섯 수를 미리 읽으며 서방의 허(虛)를 찌르는 ‘영리한 지도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속전속결로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민간인 희생을 최소화해 ‘해방’시키겠다는 그의 초기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제 피난에 나선 민간인들에게까지 무차별 폭격하고, 유대계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44)을 유대인을 학살한 ‘신(新)나치주의자’로 비난하는 푸틴을 보면서, 그의 정신 상태(mental state)에 의심을 품는 미 안보분석가들이 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백악관 미팅에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푸틴을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것에 대한 우려와 그의 정신 상태를 긴급히 재점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고 보도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크렘린의 어느 누구도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나치로 모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얘기인지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홀로코스트 기념관 부근을 미사일 공격하면서 나치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논리를 펴는 것을 보면, 러시아군의 하드웨어는 잘 작동하는지 몰라도 스토리를 끌어가는 소프트웨어는 마비됐다”고 지적했다.

◇조지아 침공 때는 일부러 수도 공격 안했는데…

이전의 푸틴은 기회주의적이면서도, 치밀하게 계산적이었다. 2008년 조지아를 침공했을 때에는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면서도, 수도 트빌리시는 공격하지 않고 전쟁을 멈췄다. 당시 친(親)서방 대통령인 미헤일 사캬슈빌리의 전복도 꾀하지도 않았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를 침공했을 때에는, 돈바스 너머로 진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10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을 유발하고, 민간인 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서방의 경제 제재엔 핵무기의 “전투 태세” 명령으로 맞섰다. 국내에서도 반(反)푸틴 언론매체는 모두 폐간시키더니, ‘허위 정보’를 유포하면 최대 징역 15년 형을 부과하는 형법 개정을 했다. 이 탓에, BBC 방송을 비롯한 일부 서방 언론이 러시아내 보도를 중단했고, 페이스북도 차단됐다.

코너에 몰리자, 오히려 판세를 키우는 식이다. 상원 정보위원회의 공화당 간사인 마르코 루비오 상원 의원은 “푸틴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푸틴이 5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리라고 전제하는 것은 실수일 것 같다”고 트윗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러시아 선임 분석가였던 ‘뉴아메리칸시큐리티 센터’의 펠로우인 안드레아 켄달-테일러는 “푸틴의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해진 것 같다”며 “정권이 폭압적이 될수록, 그 지도자는 갈수록 그 사회의 현실과 괴리돼 편집광(偏執狂)적 기질이 강해진다”고 외교∙안보 전문지인 포린폴리시에 밝혔다.

◇ 코로나 팬데믹 방역으로 현실 감각 떨어졌나?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푸틴의 정신 상태를 묻는 질문에 즉답을 피하고, “푸틴이 분명히 코로나로 인해 매우 고립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만 말했다.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푸틴은 심지어 모든 측근에게 대면(對面) 보고에 앞서 2주간 격리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도 참모들은 6m짜리 길죽한 테이블에 멀찍이 앉아 보고 한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왼쪽 끝 두번째)와 참모총장에게 핵무기의 전투태세 명령을 내리는 모습. 보고자들은 2주간 코로나 격리 방역을 한 뒤에, 푸틴과 6m 떨어져 앉아 보고한다./EPA 연합뉴스

물론 이런 분석에 대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그만큼 ‘애착’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또 미국시라큐스대의 러시아정치 전문가인 브라이언 테일러는 “서방 정보 당국과 언론이 푸틴을 너무 이성적 인물(rational actor)로 봤다”고 말했다. 서방 언론에 주로 묘사된 푸틴은 사이버 전쟁의 마스터였고, 천재성을 지닌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푸틴은 엉망진창인 된 우크라이나 전쟁에 제발로 걸어들어갔다. 그는 “막대한 국방예산이 낭비나 부패 없이 효율적으로 쓰였다” “서방의 경제 제재는 너끈히 견딜 수 있다”는 등의 측근들 보고만 들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그다지 위대하지 않은 푸틴(Putin Not So Great)’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1,2년 뒤 관건은 ‘우크라이나가 생존하느냐’가 아니라, ‘러시아가 살아남을 것이냐’ ‘11개 시간대에 걸쳐 사는 1억4000만 명의 러시아인이 쓸데없는 전쟁으로 막대한 부(富)와 피를 허비한 푸틴에 충성할 것이냐’가 될 것”이라며 “푸틴은 곧 탈출구를 찾아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푸틴은 코너에 몰리면 공격적으로 판돈을 키워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의 칼럼니스트인 애덤 투즈는 “푸틴은 코너에 몰리면 판돈을 키우고 더 공격적이 되는 타입”이라며 “그런 면에서 서방이 경제 제재를 가하면 푸틴이 생각을 바꾸고 물러나리라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일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현재로선 서방의 일관적인 대응과 단합성을 보여주기 위해 러시아 경제에 고통을 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푸틴의 다음 수순(手順)에 대한 백악관 상황실의 논의는 지난 2년간 코로나 고립으로 인해, 푸틴의 위험을 감수하려는 정도와 야망이 변경됐는지에 대한 ‘정신 상태’와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보도했다. 또 “서방의 제재가 매우 신속하게 이뤄지면서, 오히려 푸틴이 자극을 받아 우크라이나 너머의 몰도바나 조지아로 확전하거나 미 금융기관에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하고 핵 위협을 할 가능성 등을 우려한다”는 것이다.

베스 새너 미 국가정보국 부국장을 지냈던 베스 새너는 이 신문에 “푸틴은 지나치게 욕심냈다가 발목이 잡히면 더 밀어붙이는 타입이며, 독재자는 물러나면 약해보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물러날 수도 없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