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한 지도 3주가 지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뚜렷한 ‘전과(戰果)’도 없이, 주요 도시들을 마구 파괴하고 민간인의 대량 사망을 초래하는 잔인한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 10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화상 각료회의를 하고 있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로이터 뉴스1

애브릴 헤인스 미 국가정보국장(DNI)은 지난 8일 미 하원 정보위원회에서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푸틴은 이 전쟁을 질 여유가 없다(cannot afford to lose)”고 말했다. 다만 헤인스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푸틴이 겪는 막대한 비용을 고려할 때에, 그가 기꺼이 ‘승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푸틴이 이 잔혹한 전쟁을 계속해 가는 배경에는 전쟁에서 진 러시아의 역대 차르(Czar)는 예외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거나 실각했던 러시아 역사도 작용한다고, 서방 안보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래서 푸틴이 ‘승리’를 주장하고 물러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얘기들도 나온다.

◇러시아 지도자에게 ‘군사적 패배’는 격변과 몰락을 초래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책을 쓴 미기업연구소(AEI) 선임 연구원인 리언 아론은 7일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군사적 패배를 용서하지 않아, 주요한 패배는 거의 모두 격변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러시아에서 전쟁 실패의 결과는 지배자에게 가혹했다.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오스만제국∙영국∙프랑스 등과 맞붙었던 크림 전쟁(1853~1856)에서 진 뒤, 알렉산드로 2세는 농노(農奴) 해방 등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귀족 지주들과의 갈등과 차르 체제에 대한 불신이 쌓여 결국 폭탄테러로 사망했다.

러∙일 전쟁(1904~1905)의 패배는 제1차 러시아 혁명(1905년)으로, 제1차 대전의 재앙은 니콜라이 2세의 암살과 볼셰비키 혁명으로 이어졌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초래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2년 뒤 실각했다. 198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과 2년 뒤 소련 해체가 뒤를 이었다.

3월 1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벨라루스 대통령과 회담을 위해 홀에서 기다리고 있다./AFP 연합뉴스

◇푸틴이 계속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

푸틴은 이런 역사를 너무나 잘 안다. 게다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그를 “전쟁범죄자(war criminal)”로 부르기 시작했고, ‘실각한 푸틴’은 전범(戰犯)으로 국제형사재판소 법정에 기소될 수도 있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의 브라이언 클래스는 “회고록을 써 북투어(book tour)를 하거나 원로 정치인으로서 멋진 삶을 사는 자유 진영의 퇴임 지도자와 달리, 실각한 독재자에게 ‘제2의 인생’은 없다”고 말했다.

실패를 인정할 수 없기에 푸틴은 계속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고 전쟁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뉴욕타임스의 논설위원 피터 코이는 여기엔 △이미 이 전쟁에 쏟아부은 자원과 희생이 막대하다는 ‘매몰비용(sunken cost)’의 오류 △조금만 더, 한 주만 더 비용을 감수하면 우크라이나가 무너질 것이라는 착각 △도저히 패배를 인정할 수 없기에 계속 판을 키우는 도박꾼의 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매몰비용 오류’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20년을 끈 미국의 아프간 전쟁이었다.

◇ ”제2의 푸틴을 막기 위해, 처절하게 패배시켜야 한다”는 논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지난 5일 “푸틴의 침공 행위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고, 또 실패한 것으로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푸틴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기소해 그의 야만적 전쟁 범죄를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도 거세다. 이는 ‘제2의 푸틴’을 꿈꾸며 이웃 나라를 침공할 구실만 찾는 독재자들의 의지를 꺾고 분명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도, 일리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것을 잃어 계속 하면 파산이 명백한 도박꾼도 결국은 더욱 세게 베팅을 하는 선택을 한다. 푸틴에게 전쟁 실패는 ‘모욕’이다. 넬슨 만델라가 말했듯이 “비록 정당하게 그에게 수치를 줬다할지라도, 세상에 수치를 당한 사람보다 더 위험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모욕(수치)을 당한 사람보다 더 위험한 사람은 없다는 만델라의 명구./AZ Quotes

게다가 푸틴은 전쟁에 실패한 러시아 지도자의 말로(末路)를 알기에, 군 병력과 별도로 수십 만 명에 달하는 경호∙보안 부대를 주변에 포진하고, 일체의 반(反)푸틴 매체와 시위를 강력하게 틀어막고 있어, 내부 쿠데타의 가능성은 낮다. 서방으로선 앞으로도 당분간 푸틴과 계속 동거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서방, 우크라이나 지원 계속 하되…”

이런 맥락에서, 푸틴이 ‘승리’했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푸틴이 ‘후퇴’하기도 쉽다는 주장이 나온다. 푸틴이 ‘국내용’으로 승리를 주장하면서 물러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사태도 막후 협상 끝에 미국이 10월27일 이미 예정돼 있던 터키의 중거리 미사일 주피터의 철수 계획을 앞당기겠다고 약속하며 흐루쇼프의 체면을 살려주고, 흐루쇼프가 다음날 쿠바 미사일 건설 폐지를 발표하는 수순을 밟았다.

그러나 러시아가 ‘승리’했다며 우크라이나에서 철군할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 러시아는 이미 동부 돈바스 지방과 크림 반도를 군사적으로 장악한 상태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 포기를 주장하며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승인한 돈바스의 두 친(親)러 자치공화국과 크림반도에 대해 우크라이나가 영유권을 포기하고 나토 가입을 단념하는 정도를 갖고 철군의 명분으로 삼기엔 약하다는 것이다. 애틀랜틱 몬슬리는 지난 14일 ‘푸틴에게 출구가 필요하다(Putin Needs an Off-Ramp)’는 글에서 “현상유지(status quo)를 깨겠다고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로선 이제와서 ‘현상유지’를 전리품으로 소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진단했다.

우크라이나 역시 모든 역경을 견뎌낸 상태에서 러시아가 원하는 ‘현상유지’에 동의할지도 의문이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이번 전쟁을 치르며 유럽의 민족국가로서 나토와 유럽연합(EU) 회원국 자격이 있음을 분명히 과시했다.

애틀랜틱 몬슬리는 “서방 외교관들은 일단 우크라이나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되, 휴전 회담은 반드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이뤄지게 해 우크라이나가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휴전 조건을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고 전했다.

이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나토 가입 포기 의향을 여러 번 밝혔다. 또 나토 가입 포기와 돈바스에 대한 무력 충돌 중단, 크림 반도에 대한 영유권 포기 등은 나중에 후임자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정책이다.

뉴아메리칸시큐리티 센터의 대서양안보프로그램 디렉터인 안드레아 켄달-테일러도 17일 포린폴리시에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며 러시아를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하되, 푸틴이 물러서려고 하면 관계 개선의 계획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