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틀째인 2월25일 대통령 집무 청사 마당에서 폰으로 주위의 관리들을 비추며 “우리 모두 여기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강인한 항전(抗戰) 의지를 불어넣은 장면이었다. 그러나 사실 젤렌스키는 당시 이탈한 고위 관리∙군(軍) 간부들의 숫자에 놀랐다고, 시사 잡지 타임 최신호가 보도했다.

5월9일-5월16일자 합본호로 나온 시사 잡지 타임의 커버로 실린 젤렌스키 대통령/타임 트위터

타임은 2주 동안 대통령 집무 청사에서 함께 지내며 젤렌스키와 고위 관리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젤렌스키를 표지 기사로 다뤘다. 젤렌스키는 아내와 딸(17)∙아들(9)이 청사에 있는 순간에, “러시아군 특수부대가 낙하산으로 수도 키이우로 침투해 수분 내 급습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에 처한 적이 두 차례 있었다”고 이 잡지에 말했다. 다음은 이 잡지에 소개된 주요 내용.

◇대통령 집무 청사 주변 암호는 러시아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뜻 모를 말

젤렌스키와 정부 고위 관리들은 수도 키이우의 반코바 스트리트에 있는 청사 지하 벙커의 간이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공습 사이렌과 옆에 놓인 전화기는 계속 울려댔다. 젤렌스키는 동트기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오전5시면, 각 부대에서 현황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청사 주변의 민간인 차량은 당연히 접근 금지고, 보행자는 매일 바뀌는 암호를 대야 했다. 종종 러시아인이 발음하기도 힘들고,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젤렌스키는 24일 동트기 직전, 러시아군 공격의 처음 몇 시간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이미지와 소음들의 파편화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침략이 시작되고 처음 2주 동안, 러시아 포대(砲隊)는 키이우를 사정권에 두는 인근까지 접근했다. 러시아군은 두 차례나 불과 수분 거리까지 접근했다. 러시아군의 총소리가 집무실 벽에서도 들렸다.

2월24일 개전(開戰) 첫날 저녁, 청사 주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경호원은 건물 내부를 완전히 소등(消燈)하고, 방탄조끼와 공격용 소총을 대통령 보좌진에게 나눠줬다. 그러나 이 자동 소총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보좌진의 상당수는 그가 신뢰하던 배우, 쇼비지니스계 출신들이었다.

◇러시아 특수부대의 두 차례 청사 급습 시도에도, 교외 안전(安全) 벙커 거부

러시아군 특수부대가 청사를 급습하려는 시도는 두 번 있었다. 아내 올레나 젤렌스카와 딸(17), 아들(9)이 청사 내에 있을 때였다. 우크라이나군은 젤렌스키에게 “집무 청사도 안전하지 못하며, 러시아군 특수부대가 대통령과 가족을 살해하거나 생포하려고 낙하산으로 침투했다”고 보고했다.

미∙영은 인접한 폴란드 동부에 ‘망명 정부’를 세우는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대통령 측근들은 “한 순간도 젤렌스키는 그 제안을 고려한 적이 없다”고 타임 기자에게 말했다. 젤렌스키는 이후 유명해진 말인 “나는 탄약이 필요하지, 차량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는 말을 그때 했다.

청사 주변도 주택 밀집 지역이어서, 적(敵) 저격수가 은신하기에 좋았고, 일부 가옥은 창밖으로 수류탄을 던지면 청사 안으로 들어올 정도로 가까웠다. 거리를 봉쇄할 콘크리트 장벽도 동이 났다. 수도 키이우 밖에는 대통령이 상당 기간 버틸 수 있는 안전 벙커가 있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거부했다. 러시아군이 키이우 거리에서 우크라이나 군과 싸울 때에, 대통령 경호팀은 청사 주변에 온갖 장애물과 합판을 쌓아 놓았다. ‘요새’라기 보다는, 거대한 고철 야적장 같았다.

◇”우리 모두 여기 있다”며 항전 의지 불태웠지만

개전 이튿날인 2월25일, 젤렌스키는 청사 마당으로 나가 폰으로 비디오를 찍었다. 40초가량의 영상에서 국방색 티셔츠와 재킷을 입은 고위 관리들의 얼굴을 비추며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모두 여기 있다”고 말했다. 젤렌스키는 “국민이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상징이 됐다. 국가 원수답게 행동해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당시 젤렌스키는 그때 자리를 이탈한 정부 관리들과 군 간부들의 숫자가 많은 것에 놀랐다. 젤렌스키는 언제까지 복귀하라며 협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가족을 피신시킬 시간이 필요하다면, 이를 허용했다. 그저 복귀하라고 했다. 대부분 돌아왔다.

◇젤렌스키 “나를 괴롭히는 건 걱정이 아닌, 양심”

그의 정치적 동지들은 종종 규정을 어기고, 가족들을 데리고 청사 안으로 들어왔다. 대통령 유고 시 나라를 이끌어야 할 루슬란 스테판츄크 의장은 러시아 침공 첫날 아침에 ‘별도로 떨어진 곳’이 아니라, 대통령이 있는 청사로 들어왔다. 그는 타임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젤렌스키의 얼굴엔 두려움이 없었다. 우리는 아직 이 모든 게 뭘 의미하는지 파악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청사 내 생활은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심지어 뭘 먹는지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됐다.

젤렌스키는 잠을 설치게 하는 것은 걱정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양심”이라고 타임에 말했다. “나는 잠을 잤지만, 계속 밖에선 포탄이 떨어지고 우크라이나는 무너지고 러시아군은 강간과 고문의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데, 시민들은 폐허 속, 지하에 갇혀 있는데…”라는 생각이었다.

◇벙커에서 스크린으로만 전쟁을 보다가, 밖으로 나갔더니

청사 안의 젤렌스키나 정부 관리들은 우크라이나 밖의 세계 사람들과 비슷했다. 우크라이나군 드론이 러시아 탱크를 파괴하고 러시아 미사일이 아파트를 부수는 현장을 벙커에서 폰과 랩톱 화면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이 키이우 주변을 포격하고 있던 3월초, 바깥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젤렌스키는 2명의 친구와 경호팀을 대동하고 키이우 시의 북쪽 최전선으로 가 무너진 다리를 직접 봤다. 경호팀은 굳이 러시아 군 위치에 근접한 곳까지 갈 이유가 없다며,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직접 보고 싶었고, 최전선의 군인들과 얘기를 하고 싶었다.

며칠 뒤 다시 나갔다. 우크라이나의 전통 수프인 보르시(borscht)를 매일 아침 군인들에게 나눠주는 사람을 만났다. 둘은 러시아군 저격수와 러시아 포대의 사정거리 안에서 수프와 빵을 먹으며 상황을 얘기했다. 그의 한 보좌관은 “우리가 봉사하는 이들과 얘기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했다.

◇전략 수립은 군인들의 몫

타임은 젤렌스키가 매일 수시로 장군들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지시를 하지만, 전술적으로 아는 척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국방부 장관, 최고 군 지휘부는 많은 경우 젤렌스키와 의견이 달랐다. 대통령 군사고문은 “젤렌스키는 그냥 그들 방식대로 싸우게 한다”고 말했다.

대신에, 젤렌스키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랩톱과 폰 스크린으로 연설했다. 모든 문장은 각각의 청중을 고려해서, 그가 직접 다듬었다. 미 의회에선 진주만 기습과 9∙11테러를, 독일 의회에선 홀로코스트와 베를린 장벽을 얘기했다(4월11일 우리나라 국회 연설에선 6∙25 전쟁 참화를 딛고 일어서기까지 한국이 받은 국제사회의 지원을 언급했다).

젤렌스키는 “인스타그램, 소셜미디어로 보다가 지겨우면 안 보고, 끔찍한 장면에 눈을 감아버리는 게 인간 본성”이라며, 자신의 임무는 우크라이나가 이 전쟁을 ‘생존이 걸린 문제’로 보는 것처럼 자유세계도 그렇게 보도록 확신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머리 잘려 나간 한 여성의 사진에 온통 정신 빼앗겨

4월8일 러시아군 미사일이 또다시 동부 우크라이나의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을 폭격했다. 피난 열차를 기다리던 수천 명의 민간인을 노렸다. 50명 이상이 숨졌고, 여러 아이가 팔다리를 잃었다.

지난 8일 우크라이나 동부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서 피난길에 올랐다가 러시아 미사일들에 맞아 살해된 민간인들의 시신. /AFP 연합뉴스

그날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이 키이우로 찾아왔다. 이날 폰데어라이엔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신속하게 처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가 수십 년간 갈망했던 EU 가입이었다. 그러나 그 옆에 선 젤렌스키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날 미사일 폭격으로 머리가 잘려나갔던, 기억하기 쉬운 밝은 빛의 옷을 입고 있었던 한 여성의 시신 사진뿐이었다.

젤렌스키는 심지어 이날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 만행을 비난하면서도 집중할 수 없었다. 젤렌스키는 “몸은 회견장에 있는 그 순간에도, 생각은 온통 그 기차역에 가 있었다. 팔다리와 머리가 서로 다르게 움직였다”고 말했다.

이후 여러 유럽 정상과 총리들이 키이우에 방문했지만, 하나의 철칙이 있었다. 이들 일행의 스마트폰은 절대로 청사내 반입이 안 됐다. 갑자기 한 군데서 전화 신호가 무더기로 발신되면, 적의 정찰 드론이 바로 운집한 곳을 정확히 집어내 폭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친근하게 요청한다고, 무기를 주지는 않더라”

젤렌스키는 종종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고 투박하게 말한다. 친러 성향으로 간주된 독일 대통령이 키이우로 오고 있는 도중에, “오지 말라”고 막았다. 유엔 안보리 화상 연설에선 “안보리 해체를 생각해 보라”고 했다. 젤렌스키는 친근한(friendly) 요청이 우크라이나에게 무기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안다.

타임은 “젤렌스키는 자신의 핵심적인 책임이 지도 상에서 대대 병력을 움직이는 군사 전략가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국가의 상징이자 의사소통자로서 ‘우크라이나가 살지 죽을지’를 결정지을 세계의 관심을 붙잡는 능력에 있다는 것을 안다”고 전했다.

◇청사의 기본 수칙 중 하나는 ‘암흑 유지’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 주변에서 물러나 우크라이나 동부∙남부 전선에 주력하면서, 지하 벙커에서 생활하던 정부 관리들도 지상 사무실로 올라왔다. 그러나 철칙은 ‘암흑(darkness)’이었다. 적 저격수가 조준하기 어렵도록, 모든 창문은 모래주머니로 막았고, 전등도 꺼져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예방조치이지만, 엘리베이터 안의 등까지 껐다.

대통령 집무 청사를 지켜낸 키이우의 방공(防空) 시스템은 꽤 신뢰할 만 했지만, 러시아의 초음속미사일인 ‘킨잘’이 지그재그로 날아들면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타임지 기자를 만난 관리들은 이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한 관리는 “우리를 맞추면 여기는 폐허가 되겠지만, 우리야 계속 일하는 것밖에 달리 뭘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상징인 삼지창.

이제 젤렌스키는 대부분 청사 내 창문 없는 회의실인 상황실에서 보낸다. 지하도 아니고, 강화된 요새도 아니다. 벽에는 우크라이나의 국장(國章)인 삼지창(三枝槍) 장식만 있다.

한 달이 넘도록 젤렌스키는 2명의 현장 지휘관과 문자 메시지를 수시로 주고받는다. 남부 최대 도시이자, 우크라이나 최대 제철소가 있는 마리우폴의 아조브스탈 제철소를 최후 거점 삼아서 항전하는 지휘관들이었다. 이곳 해병대 소령인 세르히 볼린스키는 하도 연락해서 “서로 잘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 여단은 이제 200명밖에 남지 않았다.

◇3 년 전 대선 출마 결심을 후회 하느냐는 질문에

젤렌스키(44)의 얼굴에 주름살도 늘었다. 그는 “결코 원치 않았던 이 모든 경험으로 지혜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의 죽음과 러시아 군인들의 만행과 연결된 지혜”라며 “솔직히 말해, 결코 그런 지혜를 얻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타임에 말했다.

3년 전, 대통령 선거 출마를 결심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그때 그의 코미디는 대성공이었고, 분장실에서 그는 늘 모든 이의 칭송으로 빛났다. 친구들은 공연 후 파티를 준비했고, 밖에는 그와 사진을 찍으려고 팬들이 모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타임에 이 전쟁을 경험하면서도 “단 한 순간도 (그 결심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기록할지도 모른다. 타임은 “젤렌스키는 이 순간은 그저 우크라이나가 전시(戰時) 대통령을 필요로 하고, 이게 자신이 맡은 배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