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에 속한 9개국 정상들과 12~13일 백악관에서 특별정상회의를 갖는다. 이런 집단 정상회의는 아세안 45년 역사상 처음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최대 관심은 이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 동참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3월23일 말레이시아∙베트남이 러시아 제재 불참을 선언하며 ‘중립’ 을 선언한 것을 비롯해, 아세안 국가들은 대부분 중립∙유보적 입장이다. 싱가포르만 국제사회의 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 아세안뿐이 아니다. 미국이 구축한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에 맞서 미국∙영국∙일본과 안보 파트너십(QUAD)을 맺은 인도조차 러시아를 비난하지 않는다. 아프리카∙남미∙멕시코∙중동 지역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러시아가 침공하자, 바이든은 푸틴이 “국제사회에서 왕따(pariah)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민주주의 관심 없는 나라 정상들에게 ‘민주주의 수호’ 외쳐
왜 그럴까. 보수적 성향의 미 외교∙잡지인 포린 폴리시는 11일 “세계 대부분 지역이 비(非)민주적∙독재 국가에 속하는데,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framing)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진단했다. 즉, 대부분의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당장 12일 워싱턴에 오는 아세안 정상들의 면면을 보자. 37년 철권 통치하는 훈센 캄보디아 총리, 2014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 마약 단속을 둘러싸고 수많은 즉결 처형과 인권 유린을 빚었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이밖에 브루나이 왕국과 공산당 일당 독재인 베트남과 라오스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나마 미 NGO인 프리덤하우스가 ‘부분적 자유(partly free)’로 분류한 싱가포르는 작년 12월 바이든이 주최했던 100여 개국의 화상(畵像) 민주주의 정상회의에도 초청받지 못했다. 또 다른 ‘부분적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네시아는 11월 G20 정상회의에 푸틴을 초청해 놓은 상태다.
바이든 대통령은 3월26일 자유 세계가 연합해 우크라이나 국민을 지원해야 한다며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수년간의 투쟁에서, 우크라이나와 국민은 그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전선에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이렇게 규정한 ‘민주주의 수호’라는 구도에 동참한 나라는 유럽국가들과 미국의 안보 파트너인 한국∙일본 정도다.
미국에서 나오는 ‘민주주의의 다양성’ 올해 보고서에 따르면, 독재국가에 사는 세계 인구의 비율은 2011년 49%에서 2021년 70%로 증가했다.
◇”자국 민주주의도 망가진 미국이 민주주의 설교 자격 있나”
비(非)서방권 국가들은 또 미국 자체도 ‘망가진 민주주의’를 수선해야 할 나라로 본다. ‘민주주의의 다양성’ 보고서를 작성한 저자 중 한 명인 미국 노트르담대의 마이클 코피지 교수는 포린 폴리시에 “이들 국가 입장은 ‘대선에서 전체 주민투표(popular vote)에서 이기더라도 (선거인단 투표에서 지면)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미국이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우리 권리를 놓고 설교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리덤 하우스 보고서는 “지난 16년간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계속 쇠퇴했다”고 진단했다. 정치적 권리와 인권을 따진 미국의 ‘민주주의 점수’는 83점(100점 만점). 한국∙파나마∙루마니아와 동점이었다.
심지어 미국이 그토록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우크라이나도 사실 민주주의 점수는 61점(부분적 자유)에 불과하고, 전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 중 하나로 국제투명성기구 조사에서 122위(한국 32위∙미국 27위)였다.
◇비(非)서방권의 진짜 관심은 ‘국경의 불가침’과 현실정치(realpolitik)
포린폴리시는 “각국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민주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유엔이 승인한 국제법이 지지하는 국경의 신성(神聖) 불가침”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면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1990~1991년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의 제1차 걸프전쟁은 유엔 안보리가 무력 제재를 승인한 최후의 국제 전쟁이었다. 문제는 미국이 유엔을 만들고 2차 대전 이후 국제 질서를 구축했으면서도, 미국이 국제법과 유엔 질서를 준수한 전쟁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이후 미국도 유엔 밖에서 다국적군을 규합해 전쟁을 치렀다.
러시아의 침공에도 제제에 동참하기는커녕, 러시아 원유를 대거 사들인 인도의 관심도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경 안보’다. 힌두 민족주의를 부추기면서 갈수록 독재∙대중영합주의로 가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게 관심은 경제를 되살리고, 중국과 분쟁을 빚는 국경선을 지켜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가 러시아를 멀리하는 것은 숙적(宿敵)인 파키스탄과 밀접한 파트너 관계인 중국에게 러시아를 덤으로 안겨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남아시아 전문가인 윌리엄앤메리 대학의 라니 멀린 교수는 “모디 총리의 입장은 전적으로 현실정치”라고 말했다. 따라서 인도에게도 러시아 침공을 국경선에 대한 중대한 훼손으로 규정하는 것이 그나마 다른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 부시 때 냉전 이후 신(新)국제질서 개념을 세웠던 채스 프리먼 주니어 전(前) 국방부 국제안보 담당 차관보는 포린 폴리시에 “미국이 오랫동안 무시했던 국제법의 기본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다른 나라들의 마음을 사는 유일한 길일 수 있지만, 미국은 현재 바이든이 하듯이 ‘민주주의 영광’을 설교하는 오랜 습관을 버리지 못할 것이고, 이는 다른 나라에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어려움에 빠진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자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 워싱턴 정가에선 우크라이나 전쟁을 놓고 ‘민주주의 프레임’을 선호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지난 8일 워싱턴포스트는 ‘바이든 대통령은 동남아시아의 실권자들에게 진실을 얘기해야만 한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미국은 더 이상 냉전 시절처럼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동시에 현실정치를 펼쳐 반공(反共)주의자들의 독재∙인권 탄압에 눈을 감던 위선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설은 이런 이중 플레이가 “결국 우크라이나의 대의(大義)에 전세계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미국의 노력을 발목 잡고 있다”며 “아세안 정상들에게 바이든은 이런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음을 보여줄 기회를 얻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