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중앙은행장인 엘비라 나비울리나가 지난 2019년 모스크바에서 서방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모습. 30대부터 푸틴의 최측근 경제 참모와 경제 장관, 중앙은행장 등으로 발탁된 인물로, 현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지속하는 배경이 되는 '러시아 전쟁 경제'의 설계자다. /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고강도 제재를 버티며 공세를 계속하고 있는 배경에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엘비라 나비울리나(58)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가 꼽힌다. 최근 러시아가 국가 부도(디폴트) 위기를 무사히 넘기자 “푸틴의 흉악한 전쟁을 돕는 최고 부역자”(영국 블루베이 자산운용), “서방의 경제 전쟁에 맞서는 러시아의 비밀 병기”(미 폴리티코)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통화 정책은 배워야 할 점”(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그가 자국을 위해 외국의 제재를 잘 방어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푸틴이 전쟁을 계속하게 해 ‘세계경제의 역적’이라는 비난도 있다.

엘비라 나비울리나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가 지난달 21일(현지 시각) 모스크바 의사당에서 열린 국가두마(하원) 본회의에 출석하고 있다. 국가두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3월 제출한 나비울리나 총재 재임명 요청안을 대다수 찬성으로 승인했다. 2013년부터 러시아 중앙은행을 이끌어온 나비울리나 총재는 오는 6월 말 기존 임기를 마치고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 ‘전쟁 경제 총사령관’ 나비울리나 총재의 가장 최근 ‘업적’은 러시아 루블화 방어다. 루블화는 서방 제재가 본격화한 지난 3월 달러당 139루블까지 폭락했다가, 13일 현재 달러당 65루블을 기록하며 전쟁 직전(80루블)보다 오히려 더 강해졌다. 각국이 인플레이션과 미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상으로 환율이 폭등하는 상황에서 ‘전범(戰犯)’인 러시아는 거꾸로 가고 있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11일 “달러 대비 퍼포먼스로 볼 때 올해 최고의 통화는 루블화”라고 했다.

‘강한 루블’을 만든 과정은 이렇다. 나비울리나 총재는 지난 2월 개전 직후 자본 이동에 제한을 가하는 동시에 러시아 기준 금리를 9.5%에서 20%로 두 배 넘게 올렸다. 기업은 달러와 유로화 보유분의 80%를 루블화로 교환하도록 강제했다. 은행과 환전소가 개인에게 달러·유로를 팔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도 취했다. 외국인의 모스크바 증시 주식 처분도 금지했다. 이 같은 긴급 조치로 두 달간 급한 불을 끄고, 지난달 29일 경제 침체를 막기 위해 금리를 14%로 대폭 내렸다.

러시아가 외환 부족으로 대외 채무 이자를 갚지 못해 국가 부도(디폴트)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지만, 위기를 넘긴 것이다. 유럽의 러시아산 가스·석유 구매가 완전히 끊기지 않는 데다, 중앙은행의 강력한 자본 통제가 버팀목이 됐다는 분석이다. 이런 가운데 국제 유가가 상승해 러시아의 1분기 경상수지 흑자는 사상 최고치인 580억달러(약 74조5000억원)를 기록했다. 푸틴은 지난달 “러시아가 서방 제재에 맞서 승리했다”며 “중앙은행의 노고를 치하한다”고 했다.

나비울리나는 20여 년간 푸틴 대통령의 절대적 신뢰를 얻은 최측근이라고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한다. 운전사 아버지와 공장 노동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나비울리나는 모스크바 국립대 졸업 후, 줄곧 경제 관료로 일해왔다. 푸틴 집권 초기부터 크렘린궁 최고 경제고문, 경제개발부 장관 등을 지냈고, 2013년 러시아의 첫 여성 중앙은행장이 됐다. 남편도 경제학자다.

나비울리나는 러시아 ‘전쟁 경제’의 설계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경제 전권을 쥔 이듬해인 2014년 푸틴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했다. 당시 서방 제재와 유가 폭락, 급격한 인플레가 겹쳐 경제가 만신창이가 됐으나, 나비울리나의 지휘 속에 러시아 경제는 1년 반 만에 회복세로 돌아섰다. 2017년부터 본격적인 ‘경제 요새화’ 작업에 착수했다. 오일 머니를 쌓아 올 초 6430억달러(약 826조원)라는 역대 최고 외환 보유액을 확보했다. 달러화 비율을 40%에서 11%로 줄이고, 대신 금과 위안화, 유로화 비율을 대폭 늘려 푸틴에게 ‘전쟁 실탄’을 안겨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엘비라 나비울리나 중앙은행 총재가 지난 2017년 모스크바 외곽의 푸틴 관저에서 경제 정책을 두고 논의하는 모습. /타스 통신

사실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 서방에선 나비울리나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이 많았다. 2014년 미 포브스 선정 ‘세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 꼽혔고, 세계 경제 리더의 심포지엄인 미 연준의 잭슨 홀 미팅에 매년 참석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시절 그를 “중앙은행장의 모범”이라고 극찬했다. 경제 상황과 정책 방향을 다양한 브로치 패션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러시아의 매들린 올브라이트(전 미 국무장관)’로 불리기도 했다.

나비울리나 총재는 지난 2월 개전 직후 푸틴에게 사임하겠다는 뜻을 표했다고 한다. 서방 제재가 크림반도 합병 당시인 8년 전과는 차원이 다르고, 아무리 통화 정책으로 막아도 러시아 실물 경제가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중압감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러시아 정치권 일각에선 외환 보유액 동결 사태와 인플레 책임을 나비울리나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푸틴은 “당신이 물러나면 러시아 경제는 더 파탄 난다”며 지난달 그의 3연임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나비울리나는 다음 달부터 5년 임기를 다시 시작하는데, 그녀에게는 지난 9년간의 시련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길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