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24일 현재 전세계 식량부족과 곡물가격 폭등을 부채질하고 있는 러시아 흑해 함대의 해상 봉쇄 활동을 담은 미 정보당국의 비밀 해제된 자료를 공개했다.
이 자료를 보면, 러시아 흑해 함대는 흑해의 북서쪽인 크림반도에서 우크라이나∙루마니아 국경에 이르는 해상을 사실상 봉쇄했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래 이 해상에서 집중 훈련을 하고 오데사 항구를 비롯한 우크라이나의 주요 흑해 항구 인근에 기뢰를 설치해 선박의 출입을 막은 것이다. 현재 이 해상에는 100척 안팎의 곡물 수송선과 500~1000명의 선원이 오도가도 못하고 발이 묶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는 전세계 밀 수출의 10%를 차지하며, 이 물량의 95%는 흑해 항구를 통해 수출된다. 우크라이나는 이밖에 해바라기유(油)의 최대 수출국이고, 옥수수와 밀은 전세계 각각 4번째와 5번째 수출국이다. ‘유럽의 빵 바구니’라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차단되면서, 전세계 식량 부족 현상이 곧 전세계적인 기근으로 번질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오고 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 전함을 위협할 하푼(harpoon) 대함(對艦)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며 흑해에 민간 선박의 통로를 확보할 전함 진입 방안 등을 논의중이지만, 실효성은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우크라이나 곡물 2200만 톤 발 묶여…젤렌스키 대통령 ”봉쇄 끊어달라”
우크라이나의 국방전략센터 분석에 따르면, 이 해상에선 흑해 함대 소속 6척의 전함과 2척의 러시아 잠수함이 집중적으로 해상 활동을 펴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주요 수출 항구인 아조프 해의 마리우폴과 베르댠스크, 흑해의 헤르손은 이미 러시아 군 수중에 들어갔다. 또 흑해의 남은 항구인 오데사와 미콜라이우도 대부분 러시아군이 장악했거나 항만 시설이 크게 파괴됐고 주변 해상엔 러시아군의 기뢰가 설치됐다.
우크라이나는 작년에 1억700만 톤의 곡물과 식물성 기름을 수확했다. 이 중 7000만 톤이 수출 물량이었다. 러시아의 침공이 있기 전까지 4300만 톤이 수출됐고, 이제 총 2200만~2700만 톤의 식량이 항구에서 막힌 것이다.
이 탓에, 우크라이나 곡물의 최대 수요지인 중동의 레바논 같은 나라에선 빵값이 70%나 뛰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스위스 다보스 포럼의 비디오 연설에서 “2200만 톤의 곡물과 해바라기유, 기타 식량의 수출 길이 막혀 썩고 있다”며 서방이 러시아의 해상 봉쇄를 끊어낼 것을 촉구했다.
◇”러시아,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4억 명 먹을 식량을 무기화해”
세계식량프로그램(WFP)의 데이비드 비즐리 총재는 지난 19일 유엔 안보리에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 물량은 4억 명이 먹을 분량인데, 이 양이 세계 시장에서 사라지면서 시장 변동성이 초래됐다”고 말했다. 우르술라 폰데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24일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러시아군은 고의로 곡물창고를 폭격하고, 또 수출 물량을 강탈해 간다”며,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식량을 무기화해 전세계 곡물 가격을 폭등시키는 전략을 편다고 비난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곡물의 수출만 막은 것이 아니다. 마이클 카펜터 OSCE(유럽안보협력기구) 미국 대사는 “러시아군은 40만 톤의 곡물과 농기계 장비를 훔쳐서 러시아 장악지역으로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육상 수출의 어려움
우크라이나가 곡물을 수출할 수 있는 대안(代案)은 육상의 도로∙철로다. 철도의 경우 폴란드 4개 노선, 슬로바키아 3개 노선 등 총 13개 노선이 이웃 국가들과 연결된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철로와 도로, 역을 집중 파괴한 탓에 육상 수출은 여의치 않다. 한 분석에 따르면,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량은 1일 2만 톤에 불과하다.
운송 인프라의 파괴와 더불어, 또 다른 난관은 우크라이나와 유럽 인접국의 철로 간격(게이지)이 다르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의 철로 간 간격은 1520㎜인 반면에, 유럽 표준궤는 1435㎜다. 따라서 식량을 옮겨 싣든지, 기술적 보완을 하든지 국경에서 병목 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 인접국의 철로 인프라는 애초 우크라이나에서 오는 곡물을 수송할 능력까지 고려해 구축되지 않았다.
◇덴마크의 하푼 지대함 미사일 공급
지난 23일 덴마크가 지대함 순항 미사일인 하푼 미사일과 발사대를 우크라이나군에게 제공하겠다고 발표한것도, 흑해 함대의 해상 봉쇄를 뚫으려는 시도의 하나다. 최대 사거리 315㎞인 하푼을 러시아 전함을 겨냥해 쫓아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군이 이 미사일을 능숙하게 작동하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영국 등 나토 국가들, 흑해에 전함 진입 방안 검토
24일 영국 더 타임스는 “영국이 리투아니아와 일부 나토 동맹국들과 협의해, 흑해에 전함을 보내 곡물선박들을 호송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즉, 나토 국가들과 우크라이나 곡물에 크게 의존하는 이집트 같은 국가들을 모아서 러시아의 해상 봉쇄를 깨고 오데사 항에서 보스포로스 해협까지 ‘보호 통로’를 확보한다는 것이다. 더 타임스는 이 작전에는 항구 주변의 기뢰를 제거하는 작업이 포함될 수 있다고 밝혔다.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해협 지키는 터키의 동의 있어야
하지만, 이는 서방의 희망사항에 그칠 수 있다. 우선 미국은 직접적인 군사 개입 의사도 없지만, 흑해에 단 한 척의 전함도 갖고 있지 않다.
또 이들 서방의 전함이 통과해야 하는 지중해~마르마다해의 다르다넬스 해협과, 마르마다해~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은 1936년에 체결된 몽트뢰 협약에 따라, 터키에 있다. 몽트뢰 협약은 평시에 민간 선박의 자유로운 항행를 보장하고, 전함의 통과를 규제하는 협정이다.
터키는 우크라이나 침공 4일 뒤에 몽트뢰 협약을 발동해, 더 이상 러시아 전함이 지중해에서 흑해로 진입할 수 없도록 했다.
비록 나토 회원국이라고 해도 터키가 유럽 국가들의 전함을 흑해에 진입시키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터키는 현재 스웨덴∙핀란드의 나토 가입에 대해서도, 자국 이익을 앞세워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실상 해상 봉쇄를 하는 러시아 흑해 함대가 이들 서방 전함들의 ‘곡물 수출 항로 보호’라는 평화적 목적에 동의하리라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