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왕세자는 지난 8일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자 즉시 왕이 됐고, 이틀 뒤 왕으로 선포됐다. 선왕(先王)이 사망하는 순간, 다음 번 왕위계승자가 곧 왕이 돼 “왕은 결코 죽지 않는다(the king never dies)”라는 전통과, 군주가 사망해도 정부는 이음매 없이 지속된다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몇 달 뒤 있을 즉위식은 이 왕위 계승을 공식화하는 의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재 영국 전체에서 이는 애도 분위기는 그의 죽음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영국 정부의 암호(code) ‘런던 브리지가 무너졌다(London bridge is down)’가 단지 코드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전했다. 여왕은 1000년의 영국 왕실 역사에서 가장 오래 재위했다. 왕실 존속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대부분의 영국인에게 여왕은 ‘생애 유일한 왕’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여왕의 거처인 버킹엄 궁 앞에 나와 ‘절제된’ 슬픔을 표했다.

여왕은 영국이 유럽대륙을 2차대전에서 구해낸 나라에서 미국의 ‘응원단장’으로 쇠락해 간 지난 70년간 영국의 자존심을 지켜낸, 말 그대로 영국의 ‘혼(psyche)’이었다. 재위 기간 계속 이탈해가는 영연방 ‘가족’을 한데 모아 유지하는 구심점이었다. FT는 “여왕은 영국 그 자체였다”며 “영국인이 갖는 ‘브리티시’라는 공통의 정체성(正體性)을 스스로 표출하고 영국과 영연방의 지속성을 확인시켜주는 상징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제 과거 대영제국의 식민주의와 노예 제도에 대한 영연방 국가들의 반발과 배상 요구는 어느 때보다도 높다. 영연방뿐 아니라, 잉글랜드ㆍ웨일스와 더불어 ‘연합왕국(United Kingdom)’을 이루는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왕국 이탈 분위기도 거세다. 많은 영국인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제 영국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불안감을 표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나이든 영국인들은 어렸을 때 TV로 봤던 1953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식을 기억한다”며 “이들은 그때 우리는 2차대전 승전국이었고, 여왕은 너무나 아름다웠는데, 이제 우리는 ‘우리는 누구며, 영국은 어디로 가는 거지’라고 묻는다”고 보도했다. 위기에 처한 이 ‘국가적 정체성’을 지킬 책임은 이제 아들 찰스 3세의 어깨에 놓였다.

◇여왕, 연합왕국과 영연방을 유지시키는 접착제 역할 해

1947년 당시 엘리자베스 공주는 일생을 “브리튼의 위대한 제국 가족(empire family)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1953년 6월 여왕에 즉위했을 때, ‘위대한 제국 가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조지 6세는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브리튼 해외 영토의 왕이자,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로 즉위했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공식 칭호에서 ‘인도의 황제’는 빠졌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47년 독립했다.

1961년 여왕이 인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에, 영연방 국가였던 인도는 그를 ‘영연방의 국가 원수’가 아닌, ‘오직 영국 여왕’ 자격으로만 초청했다. 인도 공화국은 자국 내 영토에서 ‘여왕 폐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왕은 1957년 연설에서 “나는 전쟁에서 여러분을 이끌 수도 없고, 법을 행사할 수도, 공정한 행정을 관장할 수도 없지만, 내 심장과 헌신을 이 오래된 섬나라, 또 우리 형제 영연방에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왕은 이를 위해 군주로서의 책임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1961년엔 갓 독립한 영연방 국가 가나를 방문했다. 당시 가나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은 개인 숭배와 독재자의 길을 걸으며, 소련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폭발 테러가 빈번해, 의회는 여왕의 방문을 반대했다. 그러나 여왕은 “내가 두려워서 못 간 가나에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이 간다면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되겠느냐”며 강행했다.

1961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신생 독립국으로서 영연방을 벗어나 소련에 다가가는 가나를 방문했다. 여왕은 은크루마 대통령에게 댄스를 제의했고, 과거 군주와 신민이었던 두 사람의 댄스는 세계의 화제가 됐다.

국빈 만찬에서 은크루마는 감동했고 “아프리카에 부는 변화의 바람은 허리케인이 됐지만, 여왕 폐하에 대한 개인적 존경과 애정은 변함없다”고 했다. 여왕은 먼저 그에게 댄스를 제의했다. 한때 군주와 신민(臣民)이었던 두 사람이 새로운 ‘파트너’로서 춘 이 댄스는 당시 세계의 화제가 됐다.

여왕은 2011년 아일랜드를 방문했을 때에는 폭력과 갈등, 긴장의 관계였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돌이켜보면, 우리가 달리 일을 처리했으면 하는 아쉬운 것들이 있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1986년 영연방 소속 49개국 정상들이 모여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을 펼치던 남아공의 백인 정부에 대해 경제 제재를 할 것인지 투표했다. 결과는 48대1이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만이 금수(禁輸) 조치는 “자유무역에 대한 범죄”라며 반대했다. 물론 대처도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고, 남아공 정부에 흑인 인권 지도자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여왕은 대처에게 영연방의 수장으로서 경제 제재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여왕은 측근들에게 “아프리카에선 자기가 여왕이라고 생각하나”고 말했다고도 한다.

미 월간지 애틀랜틱 몬슬리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재임의 역설(逆說)은 제국이 축소되는 것을 관장하면서, 여왕은 글로벌 군주가 됐다는 점”이라고 평했다. 여왕은 왕국과 영연방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다하면서, 21세기 더욱 다문화 사회로 변한 영국을 더욱 상징하는 존재가 됐다. 논리적으로는 특권 계층에 속한 유럽의 한 ‘공주’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영국인에게 ‘상수(常數)’였던 여왕

여왕은 영국인들에게 싫든 좋든, 든든한 바위 같은 것이었다. 영국인의 지갑 속 지폐와 동전, 우표에는 모두 그의 이미지가 있다.

아버지 조지 6세 왕이 숨졌을 때에, 엘리자베스 공주는 케냐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영연방 국가들을 순방 중이었다. 영국 왕실의 한 일원은 “조지 6세가 숨질 무렵, 엘리자베스 공주의 머리 위로 독수리가 날아 올랐다”고 회고했다.

현대 국가에서, 영국 왕실은 이런 신비적 요소와 적절한 홍보를 섞어 ‘왕실’이라는 비(非)현대적 요소의 안정성을 유지했다. 여왕은 영국 왕실의 전통적인 비밀주의에서 벗어나, 제1차 걸프전쟁ㆍ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ㆍ스코틀랜드의 ‘독립’ 주민투표 등의 중대사를 앞두고는 종종 연설을 했고, 대화재ㆍ테러와 같은 국가적 참사 현장에는 모습을 드러내 아픔을 같이 했다.

킹스칼리지런던의 입헌군주제 권위자인 버논 보그다노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군주제를 원치 않는 사람들조차 96세 노인의 사망에 이렇게 애도할 수 있는 것은, 영국인들이 본능적으로 여왕이 얼마나 나라를 사랑했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7년 다이애너 전(前)왕세자비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에,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에서 나오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은 "여왕은 어디 있느냐"고 흥분했고, 결국 수많은 조화가 놓인 켄싱턴 궁 앞에 나와 조의를 표했다./핀터레스트

물론 여왕이 ‘국민의 아픔’에 뒤늦게 떠밀려 동참한 때도 있었다. 1997년 다이애나 전(前)왕세자비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도 그 중 하나였다.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영국의 타블로이드 일간지들은 “우리 여왕은 어디 있는가” “당신도 슬프다는 것을 보여달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비난했고, 결국 여왕은 수많은 조화가 놓인 켄싱턴 궁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격변기에 국왕과 총리 동시에 바뀌어

많은 영국인에게 여왕은 영국의 자존심이자, 위대함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더 화려했던 시절을떠올리게 하는 ‘교량’이었다.

여왕이 즉위할 무렵, 영국은 유럽의 최대 공업국이었고 세계 무역의 근10%를 차지했다. 지금 영국 경제(작년 GDP 2조5266억 유로)는 2차대전 패전국이었던 독일(3조5706억 유로)에 훨씬 못 미치고, 프랑스를 약간 웃돈다. 영국 정치인들의 퀄리티도 영국을 위기 속에서 승전국으로 이끌었던 ‘거인’ 윈스턴 처칠의 시대에서, 숱한 거짓말과 추문 끝에 밀려난 보리스 존슨 시대로 바뀌었다.

킹스칼리지런던의 영국 현대사 교수인 데이비드 애저턴은 파이낸셜 타임스에 “여왕 즉위 당시인 1953년 영국 정부와 공무원의 퀄리티는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오늘날 영국 총리와 정치인들의 현실 감각 결여는 그저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으로 유럽에 전쟁이 돌아왔지만, 영국은 유럽 전체를 인질로 삼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에너지 정책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유럽연합(EU) 탈퇴를 주도했던 브렉시터(Brexiters)들은 ‘글로벌 브리튼’을 주창했지만, 아직도 EU와의 온갖 법적 분쟁에서 휘말려 가장 가까워야 할 이웃 국가들과 갈등을 벌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영국은 이번에 군주와 총리가 동시에 바뀌었다. 새 국왕 찰스 3세는 윌리엄 왕세자보다도 인기가 없다.

물론 영국인의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총리다. 그러나 5일 전 총리가 된 리즈 트러스에 대한 영국인의 기대는 높지 않다. 영국인의 12%만이 트러스가 “훌륭하거나 좋은 리더가 될 것”으로 예상했고, 52%는 “형편없거나, 엉망일 것”이라고 반응했다. 총리가 지난 6년간 4번 바뀌면서, “수시로 정국 혼란을 겪는 이탈리아를 닮아간다”는 자조도 나온다.

◇연합왕국과 영연방의 미래는

브렉시트 주민투표에서, 연합왕국을 이루는 스코틀랜드(62%)와 북아일랜드(55.8%)에선 ‘EU 잔류’가 더 높았다. 그나마 브렉시트 이후 더욱 벌어진 왕국의 균열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여왕에 대한 존경심 덕분이었다.

스코틀랜드의 다수당인 스코틀랜드민족당(SNP)은 2014년 부결됐던 ‘독립’ 주민투표를 다시 실시하려고 한다. 북아일랜드의 최대 정당인 신페인 당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드의 통합을 가속화하려고 한다. ‘접착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사라진 상황에서, 영국 국교회 수장으로서의 영국 왕의 지위와 역할 같은 것도 공개 토론 대상이 될 것이라고, 영국 언론은 전했다.

왕국 내부뿐 아니다. 적지 않은 영연방 국가들이 이제 영국의 식민주의ㆍ인종차별적 유산과 결별하려고 한다. 1996년 독립국이 된 바베이도스는 작년 11월 영연방을 탈출했고, 영국 여왕의 국가원수 지위도 삭제했다. 아직까지 영국 왕을 국가원수로 인정하는 14개 영연방 국가 중에서, 지난 4월 카리브해의 6개국인 자메이카ㆍ앤티과 바부다ㆍ그레나다ㆍ바하마 등 카리브해 6개국은 곧 영국 왕의 국가원수 직을 삭제하고, 나라 이름도 바꾸겠다고 밝혔다.

지난 3월 카리브해 영연방 국가들을 방문한 윌리엄 왕세자 부부는 노예 무역의 폐해를 배상하고,영국 경제가 “우리 조상들의 등뼈를 착취해 이뤄진 것임을 시인하라”는 시위에 시달렸다.

BBC 방송의 중견 언론인 앤드로 닐은 데일리 메일에 “여왕은 영국의 자존심을 외부로 투사(投射)했고, 영국이 거울을 들여다 보면 그 안에 있었다”며 “여왕이 사라진 지금 영국이 모든 면에서 구심점을 잃고 쪼개져 나갈 위험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고 진단했다.

영국의 씽크탱크인 채텀 하우스의 소장 브론웬 매독스는 “뭐라고 딱 꼬집을 수는 없는 불안감 속에서,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세계 속에서 영국의 역할을 확신하지 못하는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70년 간 여왕이 맡았던 ‘든든한 역할’은 이제 찰스 3세의 어깨 위로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