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중순부터 미국과 유럽에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핵무기나 저위도(低威度ㆍlow yield)의 전술핵을 쓸 수 있다는 위기감이 높아졌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달 23일에도 우크라이나가 재래식 폭약으로 방사능 물질을 터뜨리는 “‘더티밤(dirty bomb)을 준비하고 있다”며, 러시아 군에 우크라이나의 화생방(化生放) 무기 공격에 대한 대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러시아가 장차 우크라이나 전장(戰場)에 핵무기를 사용하려고 ‘명분 쌓기’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랬던 것이 갑자기 완화됐다. 지난달 27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핵 공격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며 “정치적, 군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발언한 것도 한몫을 했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핵 공격과 관련해, 푸틴이 직접 말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모두 푸틴의 심복들의 입을 통해서 였다. 주변의 군불 떼기로, 서방을 긴장시키고 일시에 완화시키는 푸틴의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 수법이었다. 이 과정에서 푸틴은 전면(全面) 핵전쟁을 우려하는 서방으로부터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적 무기 제공을 억제하게 하는 효과도 거뒀고, 러시아 국내 여론도 보다 ‘호전적(好戰的)’으로 돌렸다.
◇ 푸틴, “러시아 영토는 핵 보호 받는다”는 원론적 발언만
9월 21일 푸틴은 느닷없이 서방이 러시아를 “핵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가용(可用)한 수단(all available means)을 사용할 것”이라며 “허풍이 아니다. 우리 핵무기는 나토가 보유한 것보다 더 현대적”이라고 말했다.
푸틴은 9월30일엔 다 점령하지도 못한 우크라이나 영토 루한스크ㆍ 도네츠크ㆍ 헤르손ㆍ자포리자 4개주를 강제 합병하면서, “우리가 쓸 수 있는 모든 파워와 수단을 가지고, 러시아 영토를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2차 대전에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선례(先例)”를 만들었다고 했다. 10월18일에도 “크림 반도(2014년 강제 합병)를 비롯한 이들 영토는 러시아의 핵 보호를 받는다”고 선언했다.
러시아의 핵정책은 “러시아 연방에 대한 재래식 공격으로 국가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으면” 핵 공격으로 되갚는다는 것이다. 강탈한 우크라이나 영토의 5분의1이 ‘러시아 영토’냐는 비판과는 별개로, 이는 핵 보유국가로선 당연한 선언일 수 있다. 그러면서 푸틴은 침공 초기부터 서방이 가장 우려해 온 ‘핵무기 카드’를 슬쩍 들춰 보였다.
◇ 푸틴 “핵 공격? 트러스(영국 前총리), 그 여자 정신 나갔어”
그런데 푸틴은 10월27일 모스크바의 친(親)정부적 외교정책 씽크탱크(think-tank)인 ‘발다이(Valdai) 클럽’에 참석해 “나는 러시아가 핵무기를 쓰는 것을 긍정적으로 말한 적이 결코 없다”며, 앞서 발언은 “서방 지도자들의 (핵 전쟁) 발언에 반응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리즈 트러스 전(前) 영국 총리가 8월24일 보수당 총리 경선 과정에서 기자의 질문에 “핵무기 버튼을 누를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 것을 비판했다. 트러스는 당시 “지구 멸망을 의미하는 핵무기 버튼을 누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총리의 중요한 의무로, 나는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푸틴은 “그 여자는 약간 정신 나갔다. 그런 말을 공개석상에서 하다니. 주변에서 수정했어야지. 워싱턴이라도 ‘우리랑 상관없는 얘기’라고 했어야지”라고 했다.
◇심복들은 ”우크라전(戰)에 핵무기 사용해야” 주장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10월23일 미국ㆍ영국ㆍ프랑스 등의 국방장관에게 전화해 “우크라이나가 더티밤을 사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도 이튿날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써 도발할 수 있다는 꽤 신빙성 있는 정보가 있다”고 말했다. 이 또한 전혀 근거도 없는 주장이었다.
3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우크라이나 내 원자력 시설 세 곳을 사찰한 결과 “더티밤이나 미(未)신고 핵 활동의 증거는 없다”고 발표했다. 이들 장관의 발언은 러시아가 전술핵 쪽으로 확전(擴戰)해 가려는 의도로 서방에선 해석됐다.
또 푸틴의 심복인 람잔 카디로프 체첸 공화국 대통령은 10월1일 “저위도 핵무기(전술핵) 사용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포탄ㆍ단거리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전술 핵무기를 최대 2000개 보유하고 있다. 또다른 심복인 디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보위원회 부의장도 “미국ㆍ나토 동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핵무기를 사용해도, 핵 종말이 두려워 참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장군들이 10월 중순부터 핵무기 사용 방안을 사적(私的)으로 논의했다는 정보도 미국 정보기관에 포착됐다. 그러나 이 모든 발언에서 핵 버튼의 유일한 결정권자인 푸틴은 없었다. 러시아 외무부는 “미국이 푸틴의 말을 왜곡한다”고 주장했다.
◇ 바이든 행정부 ”러시아의 핵무기 동원 징조는 전혀 없어”
러시아는 지난 주 연례 군사 훈련을 하면서 핵미사일의 성능 테스트를 했다. 그러나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이들 작전이 전술핵이나 더티밤을 쓰려는 위장(僞裝)된 행동으로는 보지 않는다”며 “푸틴이 더티밤을 쓰기로 했다는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저위력의 전술핵을 우크라이나에서 쓰는 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보다도, 푸틴에게는 더 복잡한 문제라고 말한다. 단순하게 전술핵을 전장으로 옮기고, 현장의 두 명에게 ‘발사’ 단추를 위임하는 식으로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우크라이나 전장(戰場)에서 전술핵을 쓴다고, 전황이 유리하게 바뀌는 것도 아니다. 미 육군의 유럽사령관을 지낸 벤 하지스(Hodges) 장군은 “러시아는 핵무기를 써서 전장을 유리하게 끌고 갈 훈련된 부대도 없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다만 존 커비 백악관 대변인은 “푸틴과 같이 예측 불허에 무모한 결정을 내리는 지도자라면, 아주 낮은 가능성에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서방의 ‘공포’ 극대화해, 우크라 지원 ‘억제’ 이끌어내
마이클 맥폴(McFaul) 전(前)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는 “러시아는 핵무기를 언급만 함으로써, 실질적인 군사 목표를 거뒀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에 가장 원하는 무기는 사거리가 300㎞에 달하는 미 육군의 전술용 지대지 미사일인 ATACMS다. 미국은 이 무기를 제공하면,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후방 보급 기지까지 강타할 수 있어, 교착 상태에 빠진 전쟁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ATACMS나 폴란드 등이 제공하겠다는 미그-29, 탱크는 지원하지 않는다. 맥폴은 “이들 무기는 푸틴이 막아낸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국내에서도 “우크라이나가 더티밤을 준비한다”는 거짓 선전이 먹히면서, 러시아인들 사이에선 핵무기 사용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졌다. 러시아 소셜미디어의 여론을 조사하는 ‘필터랩’사는 3일 위기 시 정부에 대한 단기적인 대중 지지가 높아지는 ‘국기(國旗) 효과(rally-around-the-flag effect)’가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핵무기’ 협박으로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조건을 수용하는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려 했다면, 이는 실패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핵무기를 쓸 것이라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 러시아가 진짜 전술핵을 쓴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7일 전면(全面) 핵전쟁을 뜻하는 ‘아마겟돈’을 경고했지만, 바이든 행정부는어떻게 대응할 것이라고 밝힌 적이 없다. 미 군사 전문가들은 핵이 아니라 재래식으로 군사 대응할 것으로 본다. 나토 회원국이 아닌 우크라이나가 핵 공격을 받았다고, 핵으로 되받아 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성 장군 출신의 데이비드 페트레이어스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나토군이 재래식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에 참전하고, 러시아 흑해 함대를 침몰시키는 것과 같은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경우 러시아도 나토에 대한 직접 공격으로 맞대응할 것이기 때문에, 이후 통제된 확전(escalation)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