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 7.8 강진이 튀르키예 남부를 강타한 지 이틀이 지난 8일(현지 시각)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남동부 도시 카라만마라슈를 방문해 취재진 질문을 받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당국 대응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면서도 “이렇게 큰 재난에 준비돼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 국민의 분노를 샀다./로이터 연합뉴스

규모 7.8 강진으로 7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튀르키예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미흡한 재난 대비와 지진 대응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끓어오르고 있다. 기적적인 구조 소식이 간간이 전해지고 있지만, 발 빠른 구조 작업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가족과 친지를 잃은 국민의 분노가 대통령 책임론으로 확산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5월 14일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 20년 철권통치를 펼쳐온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번 지진으로 위기에 몰리고 있다.

에르도안은 8일(현지 시각) 지진 최대 피해 지역 중 한 곳인 남부 하타이주 등을 방문했다. 그는 “(당국 대응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이렇게 큰 재난에 준비돼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 국민의 분노를 샀다.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불만 여론이 커지자 튀르키예 정부는 지진 관련 내용에 대한 트위터 접속을 막으며 비판 여론 차단에 나섰다. AFP통신은 튀르키예 경찰이 지진에 대한 정부 대응을 비판한 소셜미디어 이용자 18명을 구금했다고 보도했다.

튀르키예에서는 구조 작업 지연, 지난 20여 년간 징수한 ‘지진세’의 불분명한 용처 등을 두고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신축 건물 상당수가 무너져 피해 규모가 커지자 정부의 부실 규제와 솜방망이 처벌 탓이라는 지적까지 제기되며 정부 비판론이 커지고 있다. 특히 피해가 심한 튀르키예 남부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주도해 ‘건설 붐’이 일어난 지역이다. BBC방송은 건축 안전 규제가 허술하고, 규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피해가 컸다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고 전했다.

이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재건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소요되면서 민심이 더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 지질조사국(USGS)은 이번 지진으로 인한 튀르키예의 경제적 손실 추정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6%로 예측했다. 100억~1000억달러(약 12조5000억~125조원)의 손실 확률을 34%로 예상했다. 로이터통신은 재건 비용이 수십억달러에 달해 이미 인플레이션으로 타격을 입은 경제를 강하게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에르도안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계적으로 치솟는 물가에도 자신의 선거 공약이었던 금리 인하 정책을 굽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10월 튀르키예 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85% 치솟으며 1998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에르도안은 자신이 처한 최악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지진 피해를 당한 10주(州)에 3개월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비상사태가 선거 직전에야 종료되기에 오히려 에르도안이 선거에서 유리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일각에서 나온다.

에르도안은 1954년 튀르키예 최대 도시 이스탄불에서 가난한 해안경비대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73년 종교 직업학교를 마쳤고, 1981년 마마라대 전신인 악사라이 경제·상업과학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76년 반공산주의 단체인 터키학생연합에 가입하며 정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이슬람구국당(MSP) 청년지부장이 됐다. 1994년에는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시장직에 올랐다. 물 부족, 교통 혼란 등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며 유능한 행정가 이미지를 굳혔다.

에르도안은 2001년 같은 고교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정의개발당을 창당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의석의 66%를 확보하며 압승했다. 2003년 총리에 오른 뒤에는 3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4연임 금지 규정을 피해 2010년 정치 체제를 대통령 직선제로 바꾸는 개헌까지 밀어붙였다. 2014년 대선에서 승리, ‘제왕적 대통령’이 됐다. 이후 인프라 건설, 일자리 창출, 외국인 투자 유치 등 정책을 펼치며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끌어 국내총생산(GDP)이 3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는 지진 발생 전에 6월로 예정된 선거를 한 달여 앞당겨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6개 야당 대표들은 지난달 30일 ‘국가 장래 프로그램’을 담은 240쪽 분량의 백서를 공개하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아직 단일 후보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에르도안은 러시아와 경제·군사 협력 관계를 확대하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및 유럽연합(EU)과 미묘한 갈등을 빚어 왔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와 서방 사이를 오가며 경제·외교적 실리를 챙기고,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 과정에서 계속 거부권을 행사해 ‘NATO의 이단아’란 평가를 받아왔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