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방중(訪中)을 마치면서 귀국길 전용기 인터뷰에서 “제3의 수퍼파워로서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미국의 신하가 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유럽의 것이 아닌, 타이완 위기에 연루되지 말아야 한다” 등등의 발언을 했다가,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한편, 마크롱 대통령과의 인터뷰한 언론사 중 한 곳인 정치전문 뉴스 매체 폴리티코는 9일 “인터뷰를 허가한 프랑스 대통령궁(엘리제궁)의 조건에 따라, 마크롱 대통령의 일부 ‘더 솔직한 표현들’은 삭제됐다”고 밝혔다.
◇마크롱 “유럽 최대 위기는 우리 것 아닌 위기에 휘말리는 것”
마크롱 대통령은 베이징에서 광저우로 가는 A330 전용기 안에서 프랑스 경제지 레제코, 미국ㆍ유럽 정치 전문 뉴스매체인 폴리티코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유럽이 “제3의 수퍼파워”가 되는 전략적 자주성을 강조하며, 중국ㆍ타이완 분쟁에 대해 “미국의 추종자가 되서는 안 되며, 유럽이 유럽의 것이 아닌 위기에 연루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마크롱은 시진핑 중국 주석과 모두 6시간에 걸쳐 회담했다.
마크롱은 또 “유럽은 자체적인 국방 산업의 육성을 가속화해야 한다”며 “유럽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우리 것이 아닌 위기들에 연루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렇게 되면, 유럽이 전략적 자율성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며 만약 (미ㆍ중) 수퍼파워 들 간에 긴장이 고조되면, 우리[유럽인]는 우리의 전략적 자율성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시간도 자원도 없게 돼, (미국의) 신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경제일간지 레제코는 마크롱이 “우리 유럽인들은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전세계 지역에서 다른 나라들의 의제를 따라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다고 전했다.
마크롱이 평소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도 그의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을 열렬히 지지하며, 중국 정부 관리들은 유럽 국가들과의 만남에서 이 개념을 언급한다. 중국 공산당과 이론가들은 중국이 부상(浮上)하고 있으며, 미국ㆍ유럽 대서양 양안(兩岸) 관계를 약화시키는 것이 중국의 부상을 가속화한다고 믿는다.
마크롱은 “유럽이 답해야 하는 질문은 ‘타이완 위기를 부추기는 것이 유럽에게 이익인가’이며, 답은 ‘노’다. 이보다 나쁜 상황은 우리 유럽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의 의제(agenda)나 중국의 과잉반응에서 지시를 받는 추종자가 돼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프랑스 대통령 전용기가 광저우를 이륙해 파리로 떠난 지 수 시간 뒤에, 타이완을 포위하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시진핑, 유럽의 타이완 언급에 확연하게 짜증내
한편, 마크롱의 초청으로 함께 방중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위원장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시진핑과 함께 2시간 가량 3자 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마크롱과 폰데어라이엔은 타이완과 우크라이나 사태를 언급했다.
이 자리에서 폰데어라이엔은 시진핑에게 “타이완 관계를 바꾸려고 무력 사용을 위협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시진핑은 누구든지 타이완 문제와 관련해 베이징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망상이라고 응수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폴리티코는 배석자들의 말을 인용해, “시진핑은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과 관련해 일종의 책임을 지는 것에 대해 눈에 띠게 언짢아 했으며, 자신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가진 회담의 의미를 축소했다”고 전했다. 이 배석자는 또 “시진핑은 타이완 문제에 대해서도, 차이잉원 타이완 총통이 미국을 경유 방문한 것이나, 유럽 정상들이 타이완에 대한 외교 정책 이슈를 제기한다는 사실에 대해 확연히 열받았다”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과 폰데어라이엔 EU 위원장은 3자 회의에선 한 목소리를 냈지만, 이후 마크롱은 4시간가량 통역만 두고 시진핑과 단 둘이 만났다.
◇”우크라이나도 해결 못하는 유럽이, 중국에게 ‘조심해!’ 하면 믿겠나?”
마크롱은 미국ㆍ유럽 등 제3자의 타이완 문제 개입을 배제하는 시진핑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는 기내 인터뷰에서 “유럽인들은 우크라이나 위기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중국에게 타이완 문제를 놓고 ‘조심해! 행동 잘못하면, 우리도 거기 갈 거야’라고 어떻게 신빙성 있게 얘기할 수 있느냐”며 “만약 (타이완) 긴장을 고조하고 싶으면, 바로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마크롱은 또 유럽의 미국 무기, 에너지 의존도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유럽 방위산업을 육성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만약 미ㆍ중 두 수퍼파워의 긴장이 열기를 더하면 우리는 전략적 자율성을 이루지 못하고 신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슴에 ‘프렌치 테크(Frech Tech)’라고 가슴에 쓰인 후디(hoodie)를 입고 인터뷰를 한 마크롱은 “이미 유럽에선 ‘전략적 자율성’이란 개념이 이념적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폴리티코는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이 미국이 유럽에 지속적으로 안보를 보장하는 현실에 대한 질문엔 답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폴리티코 “마크롱의 더 솔직한 표현들은 요청에 따라 삭제”
폴리티코는 인터뷰 기사 말미에서 “프랑스와 많은 다른 유럽국가들의 관례대로, 프랑스 대통령궁인 엘리제궁은 인터뷰를 허가하는 조건으로 이 기사에 나오는 대통령의 모든 발언을 체크하고 ‘검증(proof-reading)할 것을 요구했다”며 “폴리티코는 프랑스 대통령과 직접 얘기하기 위해서 이 조건에 수락했다”고 밝혔다. 이 매체는 “마크롱 대통령이 타이완과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에 대해 인터뷰에서 더욱 솔직하게 얘기한 일부는 엘리제 요청에 의해 삭제됐다”고 밝혔다.
◇”마크롱, 시진핑 손에 놀아났다” 유럽과 미국서 비판 높아
미국과 유럽의 많은 정치인들은 마크롱의 ‘완화된’ 발언이 소개되자, 비난을 쏟아냈다. 마코 루비오 미 연방 상원의원은 10일 트위터에 “우리는 앞으로 기본적으로 타이완과 중국의 위협에 집중하고, 당신네[유럽인들]는 우크라이나와 유럽 문제를 처리하면 되겠네”라고 비꼬았다.
미국의 전 나토(NATO) 대사였던 아이보 달더는 월스트리트저널에 “마크롱의 발언은 유럽을 미국에서 분리해서, 미국의 최대 장점인 전세계 동맹과 파트너십을 훼손하려는 시진핑의 손에 놀아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과 독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유럽이 만들지 않은 위기는 피하겠다는 마크롱의 입장은 시진핑에게 아주 기분좋게 들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유럽의회 의원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마크롱이 ‘유럽은’ ‘우리 유럽인들은’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프랑스를 대변했을 뿐”이라며 “지난 14개월 동안 세계가 겪은 것을 보고도, 2023년 4월에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좀 놀랍다”고 말했다.
또 독일의 중도우파 의원인 노르베르트 뢰트겐(기민당)은 “마크롱의 방중은 시진핑에겐 ‘홍보 쾌거’이지만, 유럽에겐 ‘외교적 참사’”라며 “마크롱은 미국과 파트너십이 아니라 경계선을 강조하는 그의 주권(主權)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유럽에서도 고립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