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명품 제국인 LVMH(모엣 헤네시ㆍ루이 비통)의 베르나르 아르노(74) 회장은 한달에 한번 자녀 5명을 파리 본사에 있는 자신의 개인 식당으로 불러 식사를 한다. 정확히 90분간 진행되는 이 식사에서, 아르노는 미리 준비한 토론 주제를 아이패드로 읽어주고, 자녀 각각에게 조언을 구한다. 아르노 회장은 특정 임원에 대한 생각이나, 프랑스의 샴페인 포도원에서 이탈리아, 미국 텍사스주의 핸드백 제조 공장에 이르는 LVMH의 수많은 브랜드 중 일부를 개편할 때인지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고 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19일 아르노 회장과 함께 수십 년 간 명품 제국을 구축해 온 최측근 임원들과 주변인들을 인터뷰해, 아르노 회장이 자녀들을 혹독하게 후계자 감으로 교육시키고 낙하산으로 고위 임원으로 기용해 언젠가 LVMH 제국을 인수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온 과정을 보도했다.
◇ ‘캐시미어를 입은 늑대’의 자녀 교육법
그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에 종종 회사로 불러 자신의 미팅 중간에 수학 문제를 풀게 하고, 출장과 협상 현장에 데려가 일을 배우도록 했다. 심지어 어린 아들이 엘리트 그랑제콜인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시험 준비를 할 때에는, 자신도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수학책을 펴고 공부했다고 한다.
아르노는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에서 작년말 세계1위 부호로 꼽혔으며, 4월19일 현재 2080억 달러(약 276조 원)의 부를 소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킬러 본능과 정교함으로 경쟁 명품회사들을 사냥하고 여러 세대의 패션 디자이너들을 육성해 4800억 달러 가치의 LVMH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쟁자들로부터 ’캐시미어를 입은 늑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런 그의 뒤를 자녀 중 누가 잇느냐는 큰 관심거리다.
◇외견상 선두는 맏딸과 맏아들
아르노는 두 번 결혼해서, 딸 1명과 아들 4명을 뒀다. 안 드바브랭(73)과의 첫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 델핀(48)은 지난 LVMH에서 두번째로 큰 브랜드인 크리스챤 디올의 CEO에 임명되면서 화제가 됐다. 또 첫번째 부인과 낳은 아들 앙투안(45)은 LVMH에 대한 아르노 가족의 지분 상당 부분을 소유한 상장기업 크리스챤 디올 SE의 CEO로 임명됐다.
그는 1990년 이혼했고, 캐나다 출신의 유명 피아니스트인 엘렌 메르시에(63)와 재혼해, 세 아들을 낳았다. 알렉상드르(30)는 티파니의 수석 부사장, 프레데릭(28)은 태그 호이어 시계 브랜드를 운영하며, 막내 장(24) 아르노는 루이비통 시계 사업부의 마케팅ㆍ개발이사로 일한다.
최근 LVMH 연례 실적 보고회에선 ‘후계자’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아르노 회장은 지난 3월 자신의 LVMH 회장ㆍCEO직 정년을 80세로 연장했고,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프랑스인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했다. 아르노는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면서 “여러분도 정년이 연장된 것 아시죠?”라고 했다. 맨앞줄에는 다섯 명의 자녀가 앉아 있었다.
◇최고 참모들 밑에서 자녀들 일 배우게 해
아르노는 수십년 동안 크리스챤 디올을 이끌어온 시드니 톨레다노(71), 루이비통의 최고 책임자인 마이클 버크(66)와 함께 회사를 운영했다. 두 사람은 아르노 자녀들을 멘토링했다. 아르노는 아이들의 업무 수행을 면밀히 살피면서, 이들에게 종종 기질에서 약간의 ‘수정’이 필요한지 묻는다고 한다.
맏딸 델핀은 톨레다노 밑에서 12년간 디올에서 근무했고, 2013년부터는 버크와 함께 루이비통에서 일했다. 델핀은 지난 1월 암투병하는 아내와 마지막을 보내기 위해 사임한 버크와 작별하는 모임에서 “태어날 때부터 알던 분이라, 그와의 첫만남을 정확히 기억하기는 불가능하다”며 “우리는 모두 당신 옆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델핀이 지난 1월 디올 패션쇼를 진두지휘할 때, 버크는 마치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빠의 모습으로 지켜봤다고 한다. 그는 WSJ에 “델핀은 톨레다노ㆍ버크 두 사람을 견뎌내고, 두 번의 예방접종을 받았다”고 말했다.
◇후계 준비 없이 죽은 기업가 친구에게 충격
아르노 회장의 주변인들은 WSJ에 “아르노에겐 수십년 간 승계 문제가 마음 속에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2003년 자신의 절친한 테니스 파트너이자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인이었던 장 뤽 라가르데르가 75세에 갑작스레 숨지고, 이후 그 아들이 아버지가 수 년 간 쌓아온 것을 매각하는 것을 보면서 승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작년 12월에 LVMH를 최종적으로 통제하는 지주회사인 아가슈(Agache)를 합자회사 비슷한 기업 구조로 바꿔, 지배 주주가 상대적으로 작은 지분으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톨레다노에 따르면, 아르노 회장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회사 이익을 우선으로 하라고 가르쳤고, 테니스나 피아노 등에서 누가 더 잘 하는지와 같은 농담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들을 잘 아는 사람들은 WSJ에 “아이들은 모두를 형제 자매로 여기고 서로를 ‘이복(異腹)’으로 부르지 않고, 서로 경쟁이나 갈등하는 모습을 만들지 않으려고 주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톨레다노는 WSJ에 자녀들 중 한 명이 아르노 회장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아르노 회장은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며, 주어진 시점의 도전을 고려해 최적격인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며 “그는 내게 한 번도 ‘내 후계를 위해 아이들을 준비시켜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르노 회장의 그랑제콜 ‘에콜 폴리테크니크’ 편애
아르노 회장은 1949년 벨기에 국경과 가까운 루베에서 태어났다. 매우 공부를 잘했고, 엘리트 그랑제콜인 공학ㆍ과학 전문대학인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에서 공부했다. 프랑스 혁명때 설립된 이 학교는 나폴레옹이 사관학교로 바꿨다.
그는 이 대학의 교육이 자신의 세계 패션계 정복에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아르노는 프랑스 언론 인터뷰에서 “상황과 문제를 매우 빠르게 분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키워주는 프로그램”이라며 “LVMH도 그 학교에서 젊은 인재를 모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남 앙투안과 그의 누나 델핀은 이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다. 앙투안은 아버지가 그 학교를 유별나게 존중하는 것에 대해 퉁명스럽게 르몽드에 말한 바 있다. 그는 “아버지에게 ‘나는 폴리테크니크 적성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힘들었다”며 “아버지에겐 폴리테크니크만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르노는 첫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를 회사로 불러, 미팅 사이에도 짬을 내 아이들에게 수학 문제를 풀도록 했다고 한다.
◇아들 대입 수험 준비 기간에, 함께 수학 문제 풀어
두번째 부인 엘렌 메르시에-아르노도 자기가 낳은 아들 셋을 새벽부터 깨워서 피아노 연습을 시키고 늦게까지 학교 공부를 하게 했다. 아르노도 아시아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귀국 비행기 안에서 수학책을 꺼내 공부를 했다고 한다. 아들 중 한 명이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시 준비중인데, 자신도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셋째 알렉상드르(30)는 폴리테크니크에 합격하지 못했고, 나중에 이 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알렉상드르는 아버지 아르노를 대신에 2021년 티파니를 158억 달러에 인수했다. 그는 나이키와 협업해서 연한 푸른색인 ‘티파니 블루(robin egg blue)’ 빛 상자에 들어간 400달러짜리 검은 가죽의 운동화 ‘나이키 에어포스 원’을 출시해 화제가 됐다. 당시 광고는 “어머니 시절에 알던 티파니가 아니다”였다.
마지막 두 아들은 모두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들어갔다. 프레데릭(28)은 다른 사람이 말을 하게 하고 그를 연구하는 아버지의 기질을 빼닮았다. 주변 사람은 “가끔 10분 동안 계속 말하게 하고, 그냥 흡수한다”고 말했다. 막내 장(24)은 미국 MIT과 영국 임피리얼칼리지런던을 거쳐 대부분의 시간을 스위스 공장에서 보낸다.
◇부의 불평등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 우려
WSJ는 최근 수년간 아르노 회장은 부의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이게 아르노 가문과 LVMH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다고 전했다.
최근 프랑스를 휩쓴 정년 연장 반대 대규모 시위에서도, 아르노 회장은 포스터에 ‘수배자’로 올랐다. 시위대는 조명탄을 터뜨리며 LVMH 본사 로비에 난입했다. 수일 뒤 LVMH는 리버라시옹을 비롯한 좌파 신문들에 이 기업이 작년에 프랑스에 낸 세금과 창출한 일자리 수를 알리는 광고 캠페인을 했다. 아르노 회장이 LVMH의 운영과 관련해 대중과 더 공개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장남 앙투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