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면치 못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황에서 요즘 뉴스에 가장 등장하는 이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아니다. 러시아의 용병(傭兵) 집단인 ‘와그너 그룹’을 이끄는 예브게니 프리고진(Prigozhinㆍ61)이다.
와그너 그룹은 전략적 가치는 별로 없지만, 러시아가 작년 5월 1일 처음 공격한 이래 1년 넘게 자존심을 걸고 공략 중인 우크라이나 동부의 소도시 바흐무트에서 최선봉을 맡았다. 용병의 상당수는 프리고진이 “6개월만 버티면 사면ㆍ석방해 주겠다”며, 러시아의 교도소에서 데려온 수형자들이다. 물론 대부분 전장에서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프리고진은 러시아 군부와의 알력과 견제 속에서 무기도 제대로 공급 받지 못했고, 와그너 그룹은 수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탓에 러시아 국방장관, 참모총장을 향해 원색적인 욕설을 되풀이하던 프리고진은 급기야 지난 9일엔 푸틴을 겨냥해 “멍청한 할아버지”라고 비난했다.
거리의 핫도그 장수에서 시작했던 프리고진이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은 자신의 노력 외에도, 그와 동향(同鄕)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푸틴의 절대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그가 사지에 몰려, 절박감에서 주인을 문 것일까.
미국의 러시아 전문가들은 CNN 방송에 “푸틴을 건드린 것은, 푸틴 체제에서 대응 없이 지나갈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고, 영국의 데일리 메일은 “프리고진이 우크라이나와 푸틴, 2개 전선에서 전쟁을 하면서, 사방에서 그를 먼저 죽이려는 적들을 맞게 됐다”고 분석했다.
◇”할아버지[푸틴]가 완전히 멍청하게 판단했다면?”
프리고진은 러시아의 나치 독일 승리를 기념하는 9일 “군 최고 간부들이 적을 죽일 포탄을 주지 않고, 우리 병사들을 죽인다”며 “행복한 할아버지는 이 상황이 오케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전쟁을 이기란 말이냐”며 “그냥 가정(假定)인데, 만약 이 할아버지가 완전히 멍청이였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여기서 ‘할아버지’는 푸틴(70)이다. 푸틴의 심복들이나, 현재 투옥된 푸틴의 정적(政敵) 알렉세이 나발니 모두 푸틴을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물론 반대파에게 푸틴은 “벙커에 숨은 할아버지(bunkernyi ded)”다.
그러더니 다음 번 녹음에선 이 말을 ‘해명’했다. “내가 포탄을 주지 않는다며, 할아버지를 언급했는데, 그럼 할아버지가 누구이겠느냐”며, 약속된 포탄의 10%만 공급한 러시아 군참모총장을 겨냥했다. 푸틴의 군부 최측근인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에겐 “바흐무트 전투 현장을 한 번 와서 보고 직접 평가하라”는 공개 서한을 소셜미디어에 공개했다.
◇”차르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궁정의 룰 깨
푸틴이 ‘황제(czar)’로 군림하는 러시아 궁정에서 신하들이 서로를 헐뜯을 수는 있어도, 황제를 비판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미국 워싱턴DC의 전쟁연구소(ISW)는 “만약 크렘린이 프리고진의 갈수록 거세지는 푸틴 공격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개인끼리는 영향력을 놓고 다투더라도 푸틴은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는 푸틴 체제의 규범이 계속 약화될 것”이라고 트위했다.
존스홉킨대의 국제관계학 교수인 세르게이 래드첸코도 “푸틴 체제에서 신하들이 윗선을 훼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푸틴이 대응해 프리고진을 제거하지 않으면, 보스(boss)가 치명적으로 약해졌다는 신호가 금세 번질 것이다. 이 체제에서 약자(弱者)에 대한 배려는 없다”고 말했다.
프리고진으로선 바흐무트와 푸틴, 2개의 전선에 끼게 된 것이다. 그만큼 푸틴과 동향이고 개인 요리사라던 그와 와그너 그룹이 바흐무트에서 사지에 몰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국의 언론인으로 2014년 이후 러시아ㆍ우크라이나 분쟁을 취재해 온 데이비드 패트리카라코스는 데일리 메일에 “프리고진은 자신의 처지를 푸틴이 보길 바라며 절망 속에 터트린 발언인지 몰라도, 이제 그에겐 바흐무트가 러시아보다 안전할 수 있다”고 기고했다.
◇청소년 시절 감방에서 성폭행 당해
프리고진의 이력은 요리사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상페테르부르크 거리의 깡패였고, 강도를 비롯한 범죄로 1980년대에 12년을 선고 받아 9년 수감 생활을 했다. 이 시절은 그에게 끔찍한 시기였다. 그의 수감 동료는 프리고진이 종종 다른 수감자들에게 카메라 앞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희생자 그룹의 한 명이었다고 말한다.
29세에 사회로 복귀한 프리고진에게 러시아는 법질서 없이 강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이른 바 ‘와일드 이스트(Wild East)’였다. 그는 감옥에서 단련된 치열한 생존 본능으로 상트페레르부르크 광장에서 핫도그 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잡화점, 음식점 비즈니스로 영역을 넓혀갔다.
1990년대 상트페레르부르크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폭력조직(마피아)이 끼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마피아는 지역의 유력 정치인들,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FSB)과 연계돼 있었다. 그 중심에 FSB의 푸틴이 있었다. 프리고진의 레스토랑에선 종종 푸틴이 주도하는 마피아 미팅이 열렸다. 그럴 때면, 프리고진이 직접 푸틴의 개인 요리사이자 웨이터가 돼 그를 시중했다.
그는 이어 연간 12억 달러에 달하는 러시아군에 대한 식자재 공급 계약을 따내며, 큰 돈을 만지게 됐다. 모스크바 시내의 학교에 대한 급식 계약도 따냈다. 2019년에는 돈에 혈안이 돼 위생 절차를 소홀히 하면서, 프리고진의 급식을 먹은 학생들이 집단으로 이질에 걸리기도 했다.
거부가 된 프리고진이 이제 원하는 것은 ‘부랑아’로 시작한 과거의 오점을 씻고 정치적 거물이 되는 것이었다. 푸틴은 2000년 5월 러시아의 대통령이 됐고, 그의 식사재ㆍ음식 공급업체인 ‘콩코드 케이터링’은 크렘린의 국빈 만찬을 담당하게 됐다. 상트페레르부르크의 선상 카페인 그의 뉴아일랜드에는 자크 시락 프랑스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찾았다. 드디어 세계적인 엘리트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프리고진은 이어 푸틴의 크렘린 요리사가 됐다. 자신의 정적들은 주로 독살 됐고, 푸틴은 병적으로 음식의 안전성에 집착했다. 프리고진이 푸틴의 개인 요리사가 됐다는 것은, 그가 이제 푸틴의 최측근 서클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2014년 러시아군이 갑작스럽게 거의 총 한 방 쏘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점령했을 때, 프리고진의 용병집단인 와그너도 참가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 민병대인 것처럼, 소속과 계급을 알리는 배지를 모두 뗀 녹색 군복 차림으로 들어갔다. 푸틴에게 와그너 용병들은 러시아군을 일부 대체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었다. 프리고진은 크림반도 점령 이후에, 러시아에서 권력과 부, 영예를 모두 쥐었다. 그의 재산은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최고 기회라 여겼던 바흐무트 전투가 ‘재앙’
작년 2월24일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전쟁이 푸틴의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이미 시리아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용병 사업을 하는 프리고진에겐 더할 수 없는 기회가 되리라고 봤다. 러시아군 전사자가 속출할수록, 와그너 용병 수요는 늘어나고, 푸틴의 의존도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작년 8월부터 러시아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한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주의 바흐무트 전투는 그에겐 정점을 찍는 전투였다. 러시아 측이 총력을 기울인 인구 7만 명의 이 소도시 전투에서 와그너는 선봉에 섰고, 도시의 거의 90%를 차지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와그너와 러시아군에게 수많은 전상자를 안기는 버티기 작전을 폈다. 서방 정보당국은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한 작년 8월부터 5월15일까지 이곳에서 러시아군과 와그너 용병 3만7000명~4만7000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미국 백악관의 존 커비 국가안보위원회(NSC) 대변인은 지난 1일 “바흐무트 전투에서 최근 5개월간 러시아 측 전사자는 2만 명이고, 이 중 절반이 와그너”라며 “전체 러시아 측 사상자는 10만 명”이라고 밝혔다.
프리고진은 러시아군의 빈약한 전술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그가 눈엣가시 같은 러시아군 수뇌부는 프리고진에게 무기를 제때 공급하지 않았다. 프리고진은 14일에는, 전날 러시아 전투기 2대와 헬기 3대가 격추된 것이 러시아군 방공망의 오인 요격에 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누출된 미 국방부 비밀 문서를 입수해 “지난 1월 와그너 병력이 수천 명씩 죽어나가자, 프리고진은 우크라이나 측에게 바흐무트에서 철수하면 러시아군의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은밀히 제안했다”고 15일 보도했다. 프리고진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지만, 사실이면 러시아에 대한 배신 행위였고 그가 얼마나 러시아군 수뇌부와 틀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꼭두각시가 저지른 치명적 실수?
이와 관련, 영국의 언론인 패트리카라코스는 “현대 러시아는 갱스터들의 국가이고, 푸틴만이 갱 멤버에게 나갈 돈줄을 쥐고 있다. 프리고진은 자신의 와그너 집단이 조국 러시아를 위해서 어떻게 죽어가는지 푸틴의 주목을 받기를 원했는지 모른다”면서 “그러나 푸틴을 건드림으로써,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고 밝혔다. 프리고진이 푸틴 체제에 부담이 되는 순간, 그는 언제든 제거될 수 있다.
4월2일 극우파 호전론을 펼치던 블로거가 팬들과 미팅을 하던 프리고진의 카페가 폭파됐다. 러시아 군부는 “우크라이나 소행”이라고 했지만, 프리고진은 “러시아 권력층 내부의 암투”라고 했다.
패트리카라코스는 “이제 프리고진에겐 바흐무트에 있는 것이 러시아로 돌아가는 것보다 안전할 수 있다”며 “청소년 시절의 빈곤에서 탈출해서 푸틴의 이너서클에 들어갔던 프리고진에겐 자신이 그동안 이룬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비참할 것”이라고 했다.
혹시 푸틴의 꼭두각시인 프리고진이 이제 조종자에게 도전한 것일까. 그건 불분명하지만, 이제 스스로를 러시아인과 푸틴에게 전황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패트리카라코스는 “프리고진이 푸틴을 전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이다. 차르에게 덤비는 유일한 룰은 이기는 것이고, 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