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존 산소량이 수시간 밖에 남지 않은 민간 심해 잠수정 타이탄을 찾으려는 국제적인 노력이 22일 오후 긴박한 단계에 돌입했다. 이를 계기로, 심해 잠수정 구조 역사에서 드문 성공 사례로 꼽히는 1973년 영국 잠수정 ‘파이시스 3호’의 구조 과정이 재조명을 받는다. 해저 케이블 매설 작업을 하던 이 민간 잠수정은 남은 산소량이 12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극적으로 구조됐다.

1973년 8월 29일 오전, 영국 해군 잠수 요원 출신인 로저 채프먼(28)과 기술자인 로저 맬린슨(35)은 아일랜드 남부 코크에서 남서쪽 240㎞ 떨어진 바다 밑에서 민간 잠수정 ‘파이시스(Pisces) 3호’를 타고 근 8시간에 걸친 해저 케이블 매설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북대서양을 잇는 전화 케이블이 어선의 그물에 걸리지 않도록 잠수정 외부의 기계식 손(manipulator)를 이용해 케이블을 진흙 바닥 속에 묻는 작업이었다.

1973년 9월 해저 488m에 갇혔다가 산소 고갈 되기 12분 전에 극적으로 구조된 영국 민간 잠수정 파이시스 3호(왼쪽)와, 구조에 동원됐던 미국의 원격로봇 잠수정인 커브 3호/미 해군

그러나 오전 9시18분 모선(母船)인 비커스 보이저 지원선에 인양되기 직전, 견인 로프에 문제가 생기면서 두 사람이 탄 지름 1.8m짜리 비좁은 잠수정은 수심 152m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어 잠수정 후미에 연결된 로프가 조류에 끊어지면서, 파이시스 3호는 다시 침몰을 시작했고 40분 뒤 488m 해저 바닥에 ‘쿵’하고 충돌했다.

기술자 맬린슨은 당시 BBC 방송에 “모터가 굉음을 내고 압력 게이지의 바늘이 마구 돌아, 마치 급강하 폭격기에 탄 것처럼 공포스러웠다”고 말했다.

◇잔존 산소량 충분한데도, 새 산소통으로 작업 시작

천만다행으로, 맬린슨은 전날 이 잠수정의 산소통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8시간 한 번 작업하기엔 충분한 양의 산소가 있었지만, 그는 산소통을 교체하고 해저 작업에 들어갔다.

또 노련한 해군 잠수요원 출신인 채프먼은 바닥에 충돌하기 40초 전에 181㎏의 추를 분리시켜 잠수정의 무게를 가볍게 했다. 잠수정이 위아래로 뒹굴며 침몰하는 상황에서도, 충격에 대비해 주변에 완충 물질을 최대한 배치했다. 두 사람은 몸을 잔뜩 웅크렸고, 충돌 시 혀를 깨물지 않도록 입 속에 천을 넣었다.

오전9시45분, 두 사람은 라디오 무선으로 모선에 연락해 자신들이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잠수정의 산소통은 이미 매설 작업을 했기 때문에, 66시간 정도 쓸 분량이 남았다. 잠수정은 거꾸로 해저 골짜기에 처박혔다.

◇산소 절약 위해, 이산화탄소 세정기 가동도 줄여

이제부터는 산소 소비를 최대한 줄이며 시간과 다퉈야 했다. 칠흑 속에서 두 사람은 말도 아끼며 거의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 잡은 손에 가끔 힘을 줘, 상대에게 자신의 ‘안녕’을 확인시켰다.

모선인 비커스 보이저가 파이시스 3호 잠수정을 인양하기 위해, 같은 시리즈인 파이시스 2호와 5호를 싣고 사고 해역에 돌아온 것은 다음날 오전. 이미 하루가 지났다.

두 사람은 산소를 아끼기 위해 이산화탄소 세정기의 가동을 최대한 줄였다. 타이머로 40분마다 세정기를 돌리기로 했지만 종종 더 늦췄고, 두 사람은 무기력해졌다. 또 다른 타이머로 알람을 설정해 교대로 잠을 자면서도, 다른 한 명이 정신을 잃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채프먼은 두 달 전에 결혼했고, 맬린슨은 아내와 세 아이가 있었다. 둘은 가족을 생각하니,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구조된 뒤 아내와 재회한 채프먼(왼쪽)과 맬린슨/자료사진

그나마 ‘퀸 엘리자베스’로부터 “신속하게 구조하겠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에는 힘이 났다고 한다. 두 사람은 발신인이 ‘여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후 메시지를 보니 대서양 횡단을 멈추고 사고 해역으로 온 대형 크루즈선인 ‘퀸 엘리자베스 2세’호였다. 크루즈선이 이어 보낸 메시지는 이랬다. “이봐요, 미안. 다른 여성이에요(Sorry boys, wrong lady).”

◇만 이틀 뒤 시작한 구조 작업은 재앙의 연속

본격적인 인양 작업이 시작된 것은 또 하루가 지난 8월31일이었지만, 재앙의 연속이었다. 구조에 나선 파이시스 5호 잠수정은 사고 잠수정인 파이시스 3호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동력이 다해 다시 부상했다. 이어 위치를 확인하고 로프를 파이시스 3호에 걸려고 했지만, 로프의 부력 때문에 실패했다. 파이시스 2호가 내려왔지만, 잠수정의 한 격실에 물이 들어오면서 다시 올라갔다. 오후 늦게 미국의 경(輕)항모 캐벗 함이 원격 로봇 잠수정 커브(CURV) 3호를 갖고 왔지만, 이번엔 전기 고장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결국 9월1일 0시쯤 두 사람이 탄 파이시스 3호 곁에는 아무도 없는 ‘원점’ 상황으로 돌아갔다. 산소는 고갈되고 있었고, 이산화탄소를 제거할 수산화리튬도 다 떨어질 판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는 힘들겠다’고 체념하려고 했다.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산소량에 달렸기 때문이었다.

1일 오전5시쯤, 파이시스 2호 잠수정이 새로운 폴리플렌 소재의 로프와 특별히 디자인된 걸쇠를 갖고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오전9시40분에 미군의 커브 3호가 또다른 견인 로프를 갖고 다시 내려왔다.

오전10시50분부터 두 잠수정을 통한 인양이 시작됐지만, 잠수정이 조류에 따라 요동을 치면서 두 번이나 커브 3호 잠수정이 건 로프가 풀렸다. 심지어 임시로 만들었던 용변통들마저 다 터졌다. 가뜩이나 지저분한 잠수정 안은 오물투성이가 됐다. 결국 수심 30m까지 올라왔을 때에 영국 해군 잠수요원들이 보다 강력한 인양 로프를 다시 걸었다.

◇84시간 여만의 구조

오후 1시37분, 드디어 물밖으로 나온 파이시스 3호 잠수정의 해치가 열렸다. 채프먼은 “해치가 열리고 신선한 공기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너무 오래 웅크려 있었던 탓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고 BBC 방송에 말했다. 두 사람은 잠수정에 들어간 지 84시간 30분 만에 구조됐다. 산소통 용량은 72시간. 두 사람은 악착같이 산소 소비를 줄였다. 게이지에 표시된 잔존 산소량은 12분이었다.

1973년 80여 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민간 잠수정의 로저 맬린슨(왼쪽)과 로저 채프먼이 아일랜드 코크 공항에 도착해서 축하의 샴페인을 받고 있다./자료 사진

두 사람은 당시 영웅이 됐다. 채프먼은 이후 이 경험을 살려 독자적인 잠수정 구조 사업을 시작했고, 2005년 8월 캄차카 반도 인근 베링해 수심 190m에 침몰한 러시아 해군의 7인승 잠수정 AS-28를 성공적으로 구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맬린슨은 1978년 은퇴할 때까지 계속 같은 회사에서 일했다. 두 사람은 이후 매년 만나며 인연을 이어갔고, 채프먼은 2020년 폐암으로 74세에 숨졌다. 채프먼은 2013년 한 인터뷰에서 “오르내리는 것 때문인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 타는 것이 좀 망설여진다”고 말한 바 있다.

맬린슨은 “만약 내가 탄 잠수정이 또 침몰해도, 그때와 다르게 취할 행동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다만 “함께 탈 사람을 고르라면 단연 채프먼”이라며 “그는 뛰어난 능력을 갖췄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공포에 질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악의 러시아 핵잠 쿠르스크 폭발 침몰 사건

영국 잠수정 ‘파이시스 3호’가 해피엔딩이었다면, 2000년 8월12일 노르웨이 바렌츠 해에서 발생한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함 폭발 침몰은 최악의 사태로 기록된다. 훈련 중이던 쿠르스크함은 폭발 사고를 일으키면서, 108m 아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틀이 지나서야 침몰 사실을 시인했고, 안보상의 보안을 이유로 채프먼을 비롯한 민간 구조 회사들과 서방 정부의 구조 지원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함수 부분이 장착한 어뢰 폭발로 인해 함수 부분이 파괴돼 침몰한 러시아 쿠르스크 핵잠수함의 인양 후 모습. 108명의 승조원이 목숨을 잃었다./자료사진

결국 8월 20일이 돼서야, 노르웨이 해군 구조대가 승조원 118명 전원이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 23명의 승조원이 피신해 있던 9번 격실도 결국은 침수되면서 사망했다. 사고 원인으로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핵잠의 어뢰실에 있던 어뢰 1개가 오작동으로 폭발하면서, 추가 폭발을 일으켰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