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국ㆍ스웨덴ㆍ폴란드ㆍ독일 등 유럽 곳곳에선 화재와 폭발 등 사보타주(비밀 파괴 공작)로 추정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시작은 지난 3월 런던 동부에서 발생한 우크라이나행(行) 보급품 창고에서 발생한 화재였다. 4월 17일엔 영국의 대표적인 방산(防産)기업인 BAE 시스템스의 웨일 탄약제조공장에서 의문의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이어 다음날인 4월 18일엔 러시아ㆍ독일 이중국적자 2명이 독일 남부에 위치한, 우크라이나로 보내는 군수품 창고로 사용된 나토(NATO)의 시설 폭파를 계획했다가 체포됐다.
5월 2일엔 발트해ㆍ지중해 동부ㆍ흑해에서 강력한 러시아의 GPS 교란 공작으로, 수천 대의 민항기가 운항에 차질을 빚었다. 5월 4일엔 우크라이나군에 제공되는 단거리 공대공(空對空) 미사일 IRIS-T를 제조하는 독일 방산기업 딜(Diehl)그룹의 베를린 인근 금속공장에서 화재가 났다.
5월 9일엔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위치한 이케아(IKEA) 매장이 불에 탔다. 스웨덴에선 작년 12월 17일 부터 4월14일까지 모두 4건의 열차 탈선사고가 발생했다. 한 철도는 76일간 폐쇄되면서, 운송 중단 피해만 3억7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스웨덴 경찰은 ‘외국 주도의 소행’ 가능성을 놓고 수사 중이다.
5월 12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최대쇼핑센터인 ‘마리뷜스카 44′에서도 대화재가 발생했다. 1400개 상점 중 80%가 전소됐다.
그리고 6월 3일에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 공항 단지 내에 있는 한 호텔 방에서 폭발물을 설치하던 26세의 청년이 화상을 입고 경찰에 붙잡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볼로미디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등 서방 정상들이 제2차 대전의 노르망디 작전 80주년을 기념하려고 도착하기 이틀 전이었다.
26세의 이 청년은 우크라이나ㆍ러시아 여권 외에 복수의 가짜 여권을 갖고 있었고,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에 속해 우크라이나와 싸웠다. 그는 이슬람테러집단이 ‘사탄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폭발물질인 TATP에 점화하려다가 실패하고 화상을 입었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엔 러시아군 정찰총국(GRU)
이케아 매장이나 폴란드의 쇼핑센터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모두 우크라이나군 지원과 관련된 장소도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 정보기관들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나토와 러시아 간 갈등이 더욱 고조되면서, 러시아가 유럽 전역에서 대리인들을 고용해 민간ㆍ군 관련 시설에 대한 사보타주(sabotage)를 부추긴다고 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후엔 러시아군의 정찰총국(GRU)이 있다는 것이다. GRU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사실상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유럽 국가 전체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동안은 왜 뜸했나
사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엔 이런 사보타주가 드물었다. 러시아군이 전장에서 워낙 고전하다 보니, 러시아ㆍ군 정보기관들이 이런 비밀 작전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계속 전진하고 있고, 러시아 군수산업들도 활기를 띠고 있다. 결국 러시아 정보기관들도 더 많은 자원을 유럽 내 비밀 작전에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미 정보 관리 출신으로 미국 싱크탱크 CNAS의 선임 연구원인 안드레아 켄달-테일러는 뉴욕타임스에 “러시아는 이제 전쟁을 유럽[나토 영역]으로 가져가기를 원하지만, 나토와 전쟁을 원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렇게 재래식 전쟁에 조금 못 미치는 일들을 벌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로 별개의 점(點)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눈 여겨 본 것은 도날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였다. 그는 5월 24일 러시아 GRU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 벨라루스ㆍ폴란드ㆍ우크라이나인 등 스파이 집단 9명의 체포 사실을 발표하며 “이들이 바르샤바 쇼핑센터 방화뿐 아니라, 리투아니아의 이케아 매장 방화에도 관여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러시아 GRU는 고도로 훈련된 자체 요원이 아니라 현지 범죄자, 범죄 집단들을 고용해 사보타주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2022년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에서 무려 600명 이상의 러시아 스파이들이 추방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GRU의 ‘손발’이 잘린 것이다.
예를 들어, 런던 동부의 우크라이나 보급품 창고에 불을 낸 것은 2명의 영국인이었다. 이들이 러시아 정보기관으로부터 돈을 받고 위치를 파악하고 방화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을 모았다. 이 방화 이후, 영국 정부는 러시아 대사관의 무관인 막심 올레비크 대령을 간첩 협의로 추방했다.
◇러시아가 노리는 것은
영국의 지정학 리스크 평가기업인 시빌라인(Sibylline)의 수석분석가 알렉산더 로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이들 범죄자가 제공하는 능력은 매우 낮지만, 서방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나토와 유럽연합 전체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이슈를 놓고 여론 분열, 긴장을 초래하기엔 충분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싱크탱크 채텀 하우스의 키어 자일스(Giles)는 “지금 일어나는 것들은 러시아가 보이는 적대 행위의 예들이고, 앞으로 더 큰 것들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에드가르스 린케비치 라트비아 대통령은 “러시아는 마음만 먹으면 어느 사회든 혼란을 야기하고,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방화ㆍ폭발 테러에 아마추어와 같은 일반 범죄자들을 고용하면, 부수적인 피해는 더 커질 수도 있다. 한 방첩(防諜)기관 관리는 파이낸셜 타임스에 “이 대리인들은 폭발물 취급이 능숙하지 않아, 민간인 사상자 피해는 더 클 수 있다”고 말했다.
GRU는 이런 그레이존(gray zone) 공격을 통해서, 우크라이나 우방국들 간에 분열을 초래하고, 군수품 공급에 지장을 초래하고, 서방의 결의(決意)도 테스트하는 것이다.
◇하이브리드 전쟁의 고수 러시아 vs. 마땅한 대응책 없는 유럽
그러나 유럽 국가들은 재래식 전면 전쟁이 아닌, 왜곡 정보 유포ㆍ불안 야기ㆍ사보타주와 같은 이른바 ‘그레이존’ ‘하이브리드’ 전쟁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응책이 없다. 인프라 시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왜곡된 정보를 차단하는 등의 ‘국내 단속’ 조치를 취하는 것 외에, 미사일을 쏴서 대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러시아는 정보를 왜곡해 퍼뜨리고 불안을 야기하고 민간 시설물을 폭파하는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하이브리드 전쟁을 수행하는 데는 고수(高手)다. 러시아는 서방의 대응을 보면서, 여러 수 중에서 어느 것이 주효했는지 파악해서 다음 단계 공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하이브리드 전쟁이 뭐냐에 대한 정확한 정의도 없다.
일부에선 유럽의 방첩 기구들이 9ㆍ11 테러 이후 중동ㆍ이슬람에서 오는 위협에 초점을 맞췄고 또 소련 붕괴 이후엔 러시아의 이런 테러 위협도 한동안 사라졌기 때문에, 러시아의 이런 저강도(低强度) 그레이존 전쟁에 대한 방첩 능력이 떨어졌다고 말한다.
유럽 국가들은 또 이미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온갖 경제 제재를 단행했고 스파이들도 쫓아냈기 때문에, 러시아의 사보타주에 맞서 새롭게 취할 수 있는 조치가 별로 없다.
또 이러한 파괴 행위들은 무작위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고 워낙 비대칭적이라, 모든 배후에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 노력, 러시아의 사주가 있다고 연결 짓기도 힘들다. 러시아가 비윤리적 파괴 행위를 했다고, 서방 국가들이 같은 식으로 대응할 수도 없다.
사보타주는 또 유럽 각국의 현지 대리인들을 통해서 진행돼, 러시아는 쉽게 꼬리 자르기를 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서방의 하이브리드 전쟁 비난에 대해, 러시아는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라며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