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보기관들은 미국이 우크라이나가 현재 서방으로부터 제공 받은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의 내륙 깊숙한 곳을 타격할 수 있게 승인해도, 전쟁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으며 오히려 러시아의 강력한 보복만 촉발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뉴욕타임스가 26일 보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 정보기관들의 이런 보고서를 받았지만, 아직 최종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5일 “비핵(非核) 국가가 핵무기 보유국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를 공격하는 것도 핵 보유국의 ‘연합 공격’으로 간주하도록 핵 교리를 개정하라”고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에 지시했다. 이는 서방이 지원한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내부가 타격을 받으면, 러시아가 다량 보유한 소형 전술 핵 무기를 우크라이나 전장(戰場)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위협이었다. 푸틴은 지난 6월에도 “러시아가 유럽 대륙에 보유한 전술 핵무기 양은 미국이 운송해올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며 전술 핵무기의 사용 가능성을 내비쳤다.
현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워싱턴 DC를 방문해 조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ㆍ공화 양당의 의회 지도자들을 만나며, 서방이 제공한 장거리 미사일의 사거리 제한을 풀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미국은 사거리 300㎞인 에이태큼스(ATACMSㆍ육군전술용미사일), 영국과 프랑스는 공동 개발한 사거리 250㎞의 스톰 섀도우(프랑스명 SCALP)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지금까지 이들 미사일로 2014년 러시아가 강제 합병한 크림 반도의 러시아 군시설과, 러시아 국경에서 수십 km 내에 위치한 러시아군 후방 기지만 타격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위협의 심각성을 미국보다 낮게 평가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보복은 서방 안보에 집단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장거리 미사일의 사용 제한을 푸는 문제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분명한 입장 표명을 기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이 제한 없이 서방이 제공한 장거리 미사일을 쓸 수 있도록 하자는 측은 러시아 깊숙이 300㎞까지 공격해 러시아군 기지와 무기고를 파괴하면, 러시아의 후방 보급로가 계속 길어져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의 전진을 저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장거리’ 허용파(派)는 또 바이든 행정부가 푸틴의 적대적인 수사(修辭)에 너무 쉽게 협박을 당하며, 미국이 우크라이나군 전력을 점진적으로 강화해 온 정책이 전장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선, 우크라이나군의 전력이 점진적으로 강화됐기 때문에, 러시아의 과격한 반응이 없었던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미 정보기관들은 우크라이나가 보유한 서방 장거리 미사일의 양이 많이 않고 서방이 추가 공급할 수 있는 수량에도 한계가 있어서, 장거리 미사일의 사거리 제한을 풀어도 전쟁에 미치는 유리한 효과는 낮은 것으로 본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이 신문은 “에이태큼스의 경우에도, 미군이 자체 수요를 위해 필요한 양을 빼면 우크라이나에 추가로 공급할 수 있는 여력이 별로 없다”고 전했다. 또 러시아가 장거리 미사일의 공격을 받은 뒤에 무기고ㆍ지휘 본부ㆍ공격헬기ㆍ폭격기 등의 위치를 미사일의 사거리 밖으로 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미 정보기관들은 반대로 장거리 미사일의 러시아 내륙 타격을 허용하면, 러시아가 유럽의 주요 시설에 대한 방화ㆍ파괴 행위(사보타지)를 강화하고, 미국과 유럽의 군 기지에 치명적인 공격을 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전쟁’ 보복은 러시아연방군의 정보총국(GRU)이 주도하며, 올 들어 강화됐다. 지난 3월 영국 런던의 우크라이나 물품 창고 방화, 6월의 독일 방산업체 딜 메탈의 베를린 공장 방화 배후에는 모두 GRU 요원들의 개입이 있었다. 또 라트비아의 건물 방화, 리투아니아의 이케아(IKEA) 화재의 배후에도 GRU가 있었다.
지난 7월 초 유럽 곳곳의 나토 군기지에서는 러시아의 잠재적인 공격 위협 정보에 따라, 경계 태세가 강화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