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일 튀르키예 앙카라 에센보아 공항 활주로에서, 러시아와 서방 간에 냉전 종식 이후 최대 규모인 26명의 스파이ㆍ인질 맞교환이 이뤄졌다. 미국과 유럽에서 이름과 국적을 세탁하고 스파이 활동을 하던 러시아와 벨라루스 출신 고정간첩 16명 및 미성년 자녀 2명과, 러시아에 스파이 혐의로 감금됐던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와 기업인 등 미국인 8명이 맞교환 됐다.
이날 풀려난 러시아 스파이에는 아르헨티나 국적으로 위장해 슬로베니아에서 수년 간 ‘마리아’와 ‘루드비히’로 살았던 아르템 둘체프ㆍ안나 둘체바 부부와 두 자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출신이면서도 어머니가 마치 스페인 국적인 것처럼 서류를 위조해 스페인 기자로 활동하며 우크라이나군과 나토(NATO)군 시설을 모니터했던 ‘파블로 곤잘레스’도 있었다.
모두 KGB(소련 국가보안위원회)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2000년 5월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전세계에 심어놓은 고정간첩 네트워크에 속한 이들이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0일 미국과 영국, 슬로베니아 등의 정보기관들이 8월에 맞교환 된 이 러시아 고정간첩들을 색출하기 위해 10여년간 벌인 첩보전을 상세히 보도했다.
◇푸틴, 권력 장악 후 고정간첩 양성교육 대폭 강화
1968년 열다섯살이었던 푸틴은 당시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던 ‘방패와 검(劍)’이라는 가상의 첩보 드라마에 푹 빠졌다. 러시아 정보원이 나치 독일의 친위대(SS)로 위장해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며 나치의 비밀을 수집하는 내용이었다.
소련은 모든 면에서 서방에 뒤졌지만, 미국에 없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신분을 위장해 적국에서 수년, 수십년을 살면서 스파이 활동을 하는 고정간첩이었다. 이들은 외교관 등의 ‘합법적인(legal)’ 신분으로 대사관에 속한 정보요원들과는 달리, 신분 자체가 모두 가짜이고 ‘불법인(illegal)’ 존재였다.
따라서 합법적 신분의 정보요원들은 간첩 활동이 적발되면 대개 추방되지만, 모든 것이 불법인 고정간첩들은 형사처벌을 면치 못한다. 영국 첩보영화의 제임스 본드가 살인 면허를 소지하고 가끔 허세를 부리며 적의 심장부에 스며드는 것과 달리, 러시아 고첩(固諜)은 마치 수도승 같은 인내와 희생 정신으로 잠복하며 조국 러시아에 헌신했다.
러시아의 고정간첩 역사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볼셰비키 정부는 적대적인 이웃 국가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따라서 외교관 신분으로 스파이를 보낼 수도 없었다. 결국 러시아는 위조 여권으로 신분을 바꾸고 제2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스파이들을 적국으로 보냈다. 미국에서 원자폭탄의 비밀을 빼낸 소련의 전설적인 고정간첩 루돌프 아벨(러시아 본명 빌리얌 겐리코비치 피셔)이 이에 해당한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KGB 기능은 분산ㆍ약화됐다. 서방 정보당국은 러시아의 고정간첩 프로그램도 종료될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소련이 해외에 구축한 광범위한 스파이 네트워크는 사라지지 않고 방치된 채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대기하다가 무덤까지 비밀을 가지고 갔다.
2000년 5월 대통령이 된 푸틴은 이 고정간첩 양성 프로그램을 다시 활성화했다. 새 스파이들을 충원했고, 타국 생활에 외롭지 않게 아예 후보생들끼리 결혼을 장려했다. 새 세대의 고정간첩들은 대부분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전공했다. 출생기록 관리가 부실하고 공무원들이 부패한 남미로 가서 새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두 종류의 러시아 고정간첩: 부트와 슬리퍼
그런데도,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의 관계 ‘재설정(reset)’을 외치며, 미국 대도시 근교에서 미국인으로 사는 러시아인 고정간첩들의 색출에 소홀했다. 그러다가 2010년 미 연방수사국(FBI)의 대대적인 ‘유령이야기 작전(Operation Ghost Stories)’으로 러시아 간첩 10명이 붙잡혔다. 이들과, 서방을 위해 이중첩자 노릇을 했다가 러시아에서 붙잡힌 러시아 정보요원 출신 4명이 맞교환됐다. 당시 이 교환도 냉전 종식 이래 최대 규모였다.
푸틴 집권 이래 러시아의 고정간첩은 러시아군 정보총국(GRU) 소속인 ‘부트(Boots)’와, 대통령 직속 해외 첩보기관인 해외정보국(SVR) 소속의 ‘슬리퍼(Sleepers)’로 나뉜다. GRU는 너무 속성으로 양산해서, 부트들은 아무리 제2외국어를 모국어인 양 써도 슬라브 액센트가 남아 있었다. 이럴 경우, 금세 드러날 수도 있는 허접한 이유를 꾸며대야 했다. GRU는 신속한 결과물을 원했다. 반면에, SVR의 슬리퍼들은 현지인과 모든 면에서 전혀 구별이 되지 않게 완전히 스며들 때까지 기다렸다.
예를 들어, 8월1일 맞교환 된 스페인 출신 기자로 위장했던 ‘파블로 곤잘레스’는 GRU 제5국 소속 부트였다. 술을 좋아하고 사교적이고 입담이 센 그는 스페인 여성을 아내를 두고도 여기저기 애인을 만들었고, 우크라이나 국방부를 비롯한 관리들과도 쉽게 친분을 쌓아 군 시설을 방문했다.
심지어 2015년 2월 모스크바에서 암살된 반(反)푸틴 정치인 보리스 넴초프의 딸도 사귀었다. 딸로부터 아버지 넴초프의 노트북 PC를 빌려서 이메일 목록을 모두 복사했다. 지난 2월 러시아 감옥에서 사망한 반체제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와도 과거 그가 스페인에서 치료 받을 때에 친분을 쌓아, 나발니의 추종자 그룹과도 자주 어울렸다.
반면에, 2010년 6월 미국에서 체포돼 결국 그해 맞교환 된 애너 채프먼(당시 28세)은 해외정보국(SVR) 소속의 전형적인 슬리퍼였다. 본명은 안나 쿠쉬첸코. 영국에서 채프먼이란 남성과 결혼해서 그 성(姓)을 땄지만, 이혼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옮겨 모델 활동을 병행하며 미모로 월스트리트의 유명 인사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며 친분을 쌓았고, 본국의 지령을 받아 미국의 정부ㆍ씽크탱크 직원들과 접촉했다.
하지만, FBI는 수년 전부터 안나 쿠쉬첸코를 감시하고 있었다. 결국 영국 MI6의 이중첩자였던 러시아 정보요원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맞교환됐다. 쿠쉬첸코는 러시아로 돌아가 모델ㆍ방송인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러시아 GRU는 풀려난 뒤 영국에 정착한 스크리팔을 2018년 3월 노비초크 신경제로 독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서방에서 무려 150여 명의 러시아 정보요원(legals)이 추방됐다. 이제 러시아는 더더욱 고정간첩들에게 의존해야 할 처지가 됐다.
◇”슬리퍼 색출하기는 바늘 산더미 속에서 바늘 하나 찾기” CIA 농담도
‘부트’인 곤잘레스가 우크라이나 전선을 누비며 GRU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던 2012년, ‘슬리퍼’인 안나 발레레브나 둘체바가 ‘마리아 메이어’라는 이름으로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마리아’는 곧 ‘루드비히’라는 위장 이름의 아르템 둘체프와 합류했다.
사실 두 사람은 이미 2003년 SVR의 간첩 후보생 시절에 결혼한 사이였다. ‘마리아’는 3년의 교육 기간 동안에 완전히 다른 자아(自我)로 태어났다. 죽은 그리스 아이의 출생 중명서를 입수해 신분을 바꾸고, 죽은 아기의 엄마를 멕시코인으로 서류를 꾸며 멕시코 여권을 받았다.
한편, 먼저 아르헨티나에 와 있던 남편 ‘루드비히’는 아르헨티나인 모친 밑에서 나미비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서류를 위조했다. 부부는 2014년에 아르헨티나 국적을 취득했고, ‘마리아’는 소피와 다니엘 두 아이를 낳았다. ‘마리아’는 극도의 산고 속에서도 남편과 능숙한 스페인어로 몇 마디만 나눌 뿐이었다. 담당 의사는 나중에 수사관들에게 “인내력이 엄청났던 여성”으로 기억했다.
이들은 일상에서 ‘러시아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러시아 슬리퍼들을 색출하는 부서인 일명 ‘러시아 하우스’에선 “마치 바늘 산더미 속에서 어느 한 바늘을 집어내기 같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둘은 계속 가짜 신분의 경력을 쌓아갔다. 2015년 9월에 ‘마리아’ ‘루드비히’ 이름으로 다시 결혼했다. 남편 ‘루드비히’의 스페인어에선 어딘지 외국 액센트가 묻어 있었지만, 그는 “아프리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이라고 둘러댔다.
◇슬로베니아로 거점 이동
새로운 신분으로 산 지 10년이 지나서, 이제 활동을 개시할 시점이 됐다. 2017년 부부는 ‘슬로베니아로 옮기라’는 지령을 받았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일이 있었다. ‘마리아’는 아르헨티나에서 혼인 신고를 하면서 친모의 국적을 오스트리아인으로 기재했다. 만약 슬로베니아가 이웃 나라에 확인하려고 하면 금세 들통이 날 수 있었다. ‘마리아’는 엄마의 국적을 오스트리아에서 멕시코로 바꿨다. 비자 발급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슬로베니아 내무부 직원은 이 수정을 눈여겨 봤고, 특이점으로 표시했다.
두 사람은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교외에 살면서, 아내는 온라인 미술품 갤러리를 운영했고 남편은 IT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집에서도 러시아어는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자동차ㆍ주택도 평범하기 그지없었고, 이주 이유를 묻는 주변의 질문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높은 범죄율”을 탓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슬로베니아 정보기관의 고민
영국의 해외정보기관인 MI6가 어떻게 본명이 ‘안나’와 ‘아르템’인 이 러시아 간첩 부부의 정체를 파악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리아(본명 안나)’는 영국 런던과 에딘버러의 미술품 시장을 자주 오갔지만, 사실은 러시아 정보원들과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2022년 3월쯤 MI6는 슬로베니아 정보기관(SOVA)의 장(長)인 요스코 카디브니크에서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간첩 부부의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고, 런던으로 직접 날아오라고 했다. 미국 CIA도 그 직전에 MI6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카디브니크는 고민에 빠졌다. 1991년 유고 연방에서 독립한 슬로베니아는 그때까지 단 한 명의 러시아 간첩도 잡아본 적이 없는 나라였다. 인구 210만 명에, 상당수는 친(親)러시아 성향이었다. 증거 확보와 검거는커녕, 당장 보안이 문제였다. 카디브니크는 가장 믿을 만한 요원들로 팀을 구성했지만, 누구에게도 전모(全貌)를 알리지 않았다.
부부는 주차 위반 딱지도 안 뗄 정도로, 보안이 철저했다. 그러나 남편 ‘루드비히(본명 아르템)’는 IT 컨설턴트인데, 정작 소셜미디어 X의 팔로워는 아내의 미술품 갤러리를 포함해 4명에 불과했다. 또 미술품에 조예가 깊은 슬로베니아의 국가안보보좌관이 아내 ‘마리아’의 온라인 갤러리 작품을 보니, 매우 조잡했다.
부부는 2021년에 6만 3000 유로의 수입을 신고했다. 그런데도 두 아이를 영국식 교육을 하는 값비싼 사립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이런 의심을 더욱 굳히게 한 것이 바로 ‘마리아’가 비자 신청 시에 수정한 엄마의 국적 변경이었다. SOVA의 미행과 도청이 시작됐고, 인터폴과 CIA를 통해 그들의 진짜 이름을 알았다.
부부는 슬로베니아에 있는 EU(유럽연합) 에너지규제기구 대표의 활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EU는 러시아산 가스를 끊고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부족 사태를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두 사람 중에서 상관인 아내 ‘마리아’는 해킹을 방지하기 위해, 냉전 시대의 통신방식인 무인 포스트를 이용해 해변가 숲의 특정 바위에 육필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2022년 12월5일 부부를 체포할 시점이 됐다. 부모의 정체를 모르는 자녀들이 충격 받지 않게, 자녀들이 집에 없는 오전 9시3분 슬로베니아 특수부대원들이 주택을 급습했을 때, 남편은 컴퓨터 모니터에 열어 놓은 여러 창들과 SVR 보안통신체계도 미처 닫지 못했다. 2층에 있던 아내도 순식간에 체포했다.
냉장고 비밀 서랍에선 현금과, 그때까지 서방이 몰랐던 새 스파이기술이 장착된 수십 개의 USB 장치들이 나왔다. 9개월 간의 추적 끝에 슬로베니아 역사상 처음으로 고정간첩을 잡는 순간이었다.
◇푸틴, 풀려난 스파이 부부를 공항에서 직접 맞아
2023년 3월, 슬로베니아 정보기관 SOVA의 수장(首長) 카디브니크는 스파이 맞교환을 원하는 러시아 측 협상대표와 불가리아 베오그라드에서 만났다. 러시아 대표는 “왜 미국 명령을 따르느냐”며, 러시아 교도소에 수감된 슬로베니아인과의 맞교환을 제안했다. 슬로베니아 측이 “러시아에는 슬로베니아인 스파이가 없다”고 하자, 러시아 대표는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 그거 확실하오?” 러시아가 원하면, 언제든지 슬로베니아인을 붙잡아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 씌울 수 있다는 암시였다.
이후 미국이 개입했고, 미국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스파이 맞교환 협상을 벌였다. 러시아 슬리퍼 부부를 검거한 것은 슬로베니아였지만, 소국(小國)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맞교환은 8월 1일 이뤄졌다. ‘마리아’와 ‘루드비히’ 부부와 두 자녀가 탄 러시아 항공기가 앙카라 공항을 이륙하고 나서, 엄마는 11세와 8세인 딸과 아들에게 엄마와 아빠의 진짜 이름이 ‘안나 발레레브나 둘체바’와 ‘아르템 빅토로비치 둘체프’이고, 러시아 국적이란 것도 알려줬다.
둘체프 부부가 모스크바에 공항에 도착했을 때, 푸틴이 직접 이들을 활주로에서 맞았다. 부부는 푸틴과 깊은 포옹을 했다. 러시아어는 한 단어도 할 줄 모르는 두 아이에게 푸틴은 “부에나스 노체스(Buenas nochesㆍ스페인어로 ‘굿 이브닝’이란 뜻)”라고 스페인어로 인사했다. 아이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푸틴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맞교환이 끝나고 미국이 감사의 뜻을 표했을 때, 슬로베니아는 새 원전(原電)을 짓고 싶다고 했다. 몇 주 뒤 바이든 행정부는 슬로베니아 정부 대표단을 백악관으로 초청했고, 웨스팅 일렉트릭과의 협력도 주선했다. 한국수력원자력도 참여한 슬로베니아의 신규 원전 도입 사업은 이렇게 구체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