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바티칸 시국이 지난해 발행한 부활절 기념우표에 한 길거리 예술가의 작품을 무단으로 사용했다가 소송에 휘말리게 됐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활동하는 길거리 예술가 알레시아 바브로가 2019년 2월 그린 벽화 이미지. /알레시아 바브로

AP통신 등 외신은 25일(현지 시각) 로마에서 활동하는 길거리 예술가 알레시아 바브로가 자신의 작품을 무단 사용한 바티칸 시 당국을 상대로 로마 법원에 지난달 13만 유로(약 1억 7900만원) 규모의 손해 배상 소송을 청구했다고 보도했다.

문제가 된 작품은 바브로가 2019년 2월 완성한 것으로, 하인리히 호프만이 그린 예수의 가슴 위로 ‘Just Use It(그냥 써)’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심장이 덧입혀진 형태다. 바브로는 이를 바티칸 시로 이어지는 다리 근처 대리석 벽면을 포함해 로마 시내 곳곳에 붙였다.

바티칸 시는 지난해 4월 부활절을 맞아 발행한 기념우표에 바브로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이 작품을 차용했다. 바티칸 시국 우표 담당 부서와 홍보팀은 이와 관련해 어떠한 입장 표명도 하지 않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바티칸 시에서 지난해 4월 부활절을 맞아 발행한 기념우표. /이베이

이탈리아의 한 기자가 운영하는 예술 블로그에 따르면 바티칸의 화폐 담당 부서 책임자가 우연히 이 그림을 지나가며 보게 됐고, 우표 담당 부서에 이 그림을 사용해보자고 건의한 결과 그의 제안이 채택됐다고 한다.

바브로는 변호사를 통해 바티칸 관련 부서에 이메일과 편지를 보냈지만, 공식 답변을 받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른 기관도 아니고 바티칸 시가 이렇게 나온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며 “나는 그들이 작품을 그린 사람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 믿었지만, 그들은 나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했다.

변호인 측에 따르면 바티칸시는 2020년 부활절 기념우표 총 8만장을 발행해 1장당 1.15 유로(약 1580원)에 판매했다. 바브로 측은 바티칸시가 자신의 작품을 이용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고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작품의 의도를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은 갤러리나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이 아닌 길거리 예술에 대해서도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선 원작자의 저작권을 존중해왔다고 지적한다. 영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유명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시(Banksy)의 저작권 소송을 대리했던 마시모 스터피 변호사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공공장소나 사유 재산에 불법으로 그린 작품이어도 미국과 유럽 대부분 국가에선 지적재산권을 인정하는 추세라며 “법은 작품이 종이에 그려졌든, 캔버스에 그려졌든, 벽이나 다리에 그려졌든 상관하지 않는다”며 이를 상업적으로 무단 사용하는 이들은 “그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명화를 보유한 바티칸은 그간 자신들의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해 기민하게 대응해왔다. 바티칸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설교를 인용한 출판물에 대해 로열티를 요구했고, 언론사에는 바티칸 박물관에서 촬영된 보도 사진의 저작권을 양도하라고 요구해왔다.

일각에선 바티칸이 길거리 예술가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고 침묵하는 것이 ‘내로남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런던 시티로스쿨에서 저작권법을 강의하는 엔리코 보나디오 교수는 “법은 차별하지 않는다”며 바티칸의 저작권을 보호한 그 법이 바브로의 저작권도 보호할 것이라고 AP통신에 말했다.

바브로는 이번 소송이 바티칸 시나 교황청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