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자국에 대한 ‘안보 보장’ 요구를 재개하면서 미국과 서방에 대한 압박 강도를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불간섭과 함께 동유럽 안보 지형을 구(舊)소련 붕괴 당시로 되돌려 놓으라는 것이 골자다. 이를 거부하면 ‘군사적 조치’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외교 협상 지속과 병력 철수 선언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가 했던 우크라이나 사태가 원점(原點)으로 되돌아가는 모양새다.

17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유엔 본부 앞에서 한 여성이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나가라’는 글귀가 적힌 팻말을 들고 반전(反戰) 시위를 벌이고 있다./AFP 연합뉴스

러시아 외무부는 17일(현지 시각) 존 설리번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를 불러 총 11페이지 분량의 ‘안전 보장 협상 관련 답변서’를 전달했다. 지난해 12월 러시아가 보낸 초안에 대해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지난달 26일 답변하자, 이에 러시아가 재답변한 형식이다.

러시아 답변서에는 지금까지 요구 사항이 총망라돼 있다. 우선 ①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 중단과 서방의 군사 고문, 훈련 교관 전원 철수 ②나토 국가와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연합 훈련 금지 ③우크라이나에 공급한 모든 외국 무기 철수를 요구했다. 서방이 우크라이나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④우크라이나·조지아 등 나토 추가 확장의 명시적 포기 ⑤구소련 국가 내 나토 군기지 추가 설치 포기 ⑥ 나토 군 자산을 1997년 이전 수준으로 되돌려 놓을 것도 답변서에 담았다. 사실상 25년 전 상황으로 복귀하겠다는 것이다. 또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평화 협정’을 이행토록 서방이 압박해야 한다는 요구도 넣었다. 민스크 평화 협정은 돈바스 지역 평화 정착 방안을 담은 것으로, 현재 우크라이나와 친러 반군은 서로 상대편이 협정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미국이 우리 요구에 합의할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러시아는 군사·기술적 조치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수일 내 러시아가 침공을 개시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먼저 공격받았다는) 자작극을 시도할 수도 있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서도 “이런 발언이 우크라이나 긴장을 고조시키고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며 날을 세웠다. 동시에 카스피해에서 20여 척의 군함을 앞세워 해상 전투 수행, 미사일과 포 사격, 어뢰 회피와 탐색 및 제거 등 해상 훈련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반군은 “상대방이 먼저 도발했다”며 이틀째 공방을 이어갔다. 자칭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은 18일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도네츠크의 한 마을을 또 포격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전날 “DPR과 LPR 9개 마을이 박격포와 유탄 발사기로 선제 공격당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이에 대해 “우리는 공격한 적이 없고, 반군이 오히려 루간스크주 마을을 포격했다”며 반박했다. 또 반군 포격으로 파괴된 유치원 건물 사진도 공개했다.

외교적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을 원한다”고 밝혔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정상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비공식회의를 통해 “러시아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할 준비가 됐다”고 거듭 경고하며 외교적 사태 해결을 종용했다.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는 “푸틴 대통령의 요청으로 조만간 러시아를 방문할 예정”이라며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간 회담을 중재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