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유엔본부 브리핑룸에서 기자 회견을 여는 바실리 네벤쟈 주유엔 러시아 대사. /유엔TV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민간인 학살 의혹을 부인하며 유엔을 무대로 국제 여론전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참극에 분노한 각국 언론의 질문과 반발이 이어지면서 무산됐다.

바실리 네벤쟈 주유엔 러시아 대사는 4일 오후(현지 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 브리핑룸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부차 지역의 민간인 학살 관련 영상은 조작(fake)”이라며 “러시아군이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입증할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이것이 우크라이나 선전전 기구가 사전에 계획한 것이란 증거를 갖고 있다”고 했지만, 회견에선 그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네벤쟈 대사는 앞서 민간인 학살 의혹에 반박하겠다며 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긴급회의를 별도 소집할 것을 요구했으나, 4월 안보리 의장국인 영국이 반대해 무산됐다. ‘우크라이나가 생화학 무기를 사용했다’ ‘부차 민간인 학살은 조작’ 등 러시아가 자국 주장을 선전하는 무대로 안보리를 활용하려 한다는 판단에서다. 그러자 네벤쟈 대사가 유엔 브리핑룸을 직접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러시아가 인권 문제로 공격받는 것은 미국 등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날조와 선전전에 농락당했기 때문”이라며 “러시아는 안보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고, 진실을 밝힐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체적 증거를 요구하는 기자들에게 “여기선 밝힐 수 없다”고 했다.

<YONHAP PHOTO-2172> 민간인 집단 매장지 살펴보는 우크라 부차 주민들 (부차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북쪽 소도시 부차에서 4일(현지 시각) 주민들이 러시아군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집단 매장지를 살펴보고 있다. 러시아군이 한 달 넘게 점령했다가 철수한 이 지역에서는 학살된 의혹이 짙은 민간인 시신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2022.4.5 sungok@yna.co.kr/2022-04-05 07:57:32/ <저작권자 ⓒ 1980-202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온·오프라인으로 브리핑에 참석한 각국 기자 수십 명이 “부차 민간인 학살 영상과 사진이 조작이라는 구체적 증거를 대라”고 요구했지만, 네벤쟈 대사는 “다 정치적 동기로 날조된 상황들” “우크라이나는 거대한 연극 무대”라는 발언만 되풀이했다. “폭격으로 피를 흘렸다는 우크라이나 여성이 (피가 아니라 포도 주스였다며) ‘가짜’라고 증언했다”고도 했다. 이 ‘포도 주스 피’는 러시아 관영 언론이 생산한 가짜 뉴스로 지난달 확인된 것이다.

브리핑 현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의 기자들로 술렁였다. 분노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는 기자도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어떤 정보를 어디에서 얻는가” “이 모든 게 가짜라는 증거를 대지 못하면 책임질 것이냐” 등 공격적인 질문이 이어지자, 네벤쟈 대사는 갑자기 마이크를 끊고 퇴장했다.

한편 이날 뉴욕타임스는 부차에서 지난 1일 촬영된 동영상과 지난달 9~11일 민간 위성업체가 촬영한 위성사진을 비교 판독, 민간인 시신 중 최소 11구 위치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러시아가 “민간인 시신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긴급히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민간인들이 살해된 시점은 러시아가 점령한 시기이며, 3주간 똑같은 형태로 방치돼 있다가 우크라이나군의 부차 수복 이후 발견됐다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의 ‘우크라이나 자작극’ 주장과 정면 배치되는 증거만 나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