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글로벌 곡물 공급난에 가뭄과 지역 분쟁까지 겹치면서 아프리카 대륙이 2000년대 들어 최악의 식량 위기를 겪고 있다. 이미 3000만명 이상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으며, 소말리아에서는 수천 명의 어린이가 아사(餓死)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아프리카에 가까운 지중해 유럽 국가들이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 재개를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렇다 할 돌파구가 나오지 않아 희생자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지난 4월 7일 소말리아 북부 반자치 소말릴란드 지역에서 계속되는 가뭄으로 한 가족이 가축을 몰고 물을 찾아 길을 떠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8일(현지 시각) 유엔 특별 보고서를 통해 “올해 연말까지 전 세계 주민 약 3억2300만명이 식량 부족 문제를 겪을 것”이라며 “특히 아프리카가 가장 큰 타격을 입어 5800만명이 빈곤과 기아 상태에 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유엔은 지난달 말 “수단과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등 동아프리카에서 1300만명, 사하라 사막 이남 ‘사헬 지대’에서 1800만명이 심각한 기근에 맞닥뜨렸다”고 밝혔는데, 불과 10여 일 만에 상황이 더 악화할 것이란 보고서를 또 내놓은 것이다. 유엔은 “저렴한 우크라이나산 곡물의 수입이 막힌 상황에서 기후 변화와 내전으로 인해 아프리카 역내 곡물 생산이 크게 줄어든 것이 원인”이라며 “수십 년간 보지 못한 극심한 식량 위기가 아프리카를 휩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2월 말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밀과 콩, 옥수수 등 주요 곡물의 아프리카 내 가격은 40~60% 이상 급등했다. 이로 인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도 구하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아프리카 북동부에선 수년째 우기 때도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물 부족 사태가 심각한 상황이다. AP통신은 “작물이 대부분 말라 죽고, 가축도 모두 폐사하면서 20만명 이상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어린이의 희생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소말리아에 파견된 유엔 인도주의 조정관은 8일 AP통신에 “이 지역에서만 수천여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비참한 상황은 에티오피아와 케냐 등 인근 국가에서도 급증세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현재 140만명에 달하는 5세 이하 아동이 극심한 영양실조에 내몰릴 상황”이라고 추정했다.

지난 5일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 거리에 굶주림으로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아이들이 앉아 있다. 유엔 인도주의 조정관은“소말리아에서만 수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AP 연합뉴스

지역 분쟁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에티오피아 북부의 경우 2년여간의 내전으로, 서아프리카 지역은 잇따른 쿠데타와 이슬람 급진 세력의 도발로 농업 활동이 사실상 중단됐다. 남수단의 경우 가뭄과 내전으로 전체 인구의 70%가 기아 상태라는 분석도 나왔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은 “부르키나파소, 말리, 니제르, 나이지리아 등에서도 3800만명이 기아 상태”라고 추정했다.

국제사회는 공동 대응에 나섰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스 등 24개 지중해 연안 국가의 경제·농업 장관들은 8일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있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회의를 열고, 아프리카 식량 위기 해결을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러시아의 흑해 봉쇄를 풀어 우크라이나산 식량 수출을 재개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도 이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곡물 수출 재개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날 터키 앙카라를 방문,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터키 외무장관과 회담 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운송을 위한 선박들의 안전 운항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해군을 막기 위해) 설치한 기뢰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며 “(식량 수출 재개는) 전적으로 우크라이나 하기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는 그러나 “러시아의 해상 공격 루트를 열어줄 수 있다”며 기뢰 제거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한편 데니스 마르추크 우크라이나 농업생산자조합(UAC) 부회장은 이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60만t의 곡물을 훔쳐 크림반도로 가져갔으며, 이 중 일부를 세바스토폴 항구를 통해 외부로 반출했다”고 말다. 그는 “이중 약 10만t이 시리아로 보내진 것이 확인됐다”며 “피해 농민을 대표해 러시아에 보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