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살아있는 경영의 신(神)’으로 불리는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90) 명예회장이 24일 노환으로 교토시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이나모리 회장은 20대의 나이에 창업해 종업원 8만여 명, 매출 1조8000억엔대(약 18조원) 기업으로 키웠고, 파산 직전의 일본항공(JAL)에 무보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해 3년 만에 되살린 인물이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그룹 명예회장/전기병 기자

이나모리 회장은 1932년 가고시마(鹿児島)에서 가난한 인쇄소 집안의 4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명문 오사카대학 의학부에 지망했지만 낙방했고 당시 신설된 가고시마대 공학부에 입학해 유기화학을 전공했다. 당시 일본은 연줄 취업이 만연했고 갓 졸업한 이나모리는 입사 지원서를 낼 때마다 번번이 떨어지다 절연체를 만드는 중소기업 쇼후공업에 취직했다. 월급이 제대로 안 나왔고 회사가 도산 직전에 내몰리자, 4년 만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당시 27세였다. 같이 나온 동료 7명과 함께 1959년 4월 자본금 300만엔(약 3000만원)으로 교토세라믹(현 교세라)을 창업했다.

대학·취업에서 실패를 거듭한 20대의 이나모리는 “인생·일의 결과=생각하는 힘X열정X능력’이라는 방정식을 만들었다. 능력은 선천적일 수 있지만 열정만큼은 내가 할 수 있고, 긍정적인 마음만 있다면 결과는 좋아진다는 믿음이다. 교세라는 창업 12년 만에 오사카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1961년 사원들과 2박3일 토론회에서 ‘전 종업원의 물심양면 행복을 추구함과 동시에 인류·사회의 진화 발전에 공헌한다’는 교세라의 경영이념을 만들었다. ‘인본주의 경영’이라는 이나모리식(式) 경영 철학의 기본이다. 경영 수법으로는 10명 이하의 소집단으로 조직을 나누는 ‘아메바 경영’ 방식을 썼다. 소조직별로 시간당 채산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인데 모든 사원이 작은 조직에선 주인공으로 경영에 참여한다는 발상에서 나왔다.

1984년에는 다이니덴덴이라는 장거리 전화회사를 설립해 일본 통신시장을 독점한 NTT에 도전했다. 이후 이 회사는 KDD·일본이동통신과 합병해 현재 2위 통신업체인 KDDI가 됐다. 2005년 교세라의 이사직을 사퇴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78세 때인 2010년 JAL 회장에 취임했다. 일본 국적기 JAL이 파산 위기에 몰리자 하토야마 유키오 당시 총리가 경영을 요청하자 수락한 것이다.

무보수 회장에 취임해 전 직원의 3분의 1에 달하는 1만6000명의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3년이 지나지 않아, JAL은 흑자 전환했고 2012년 도쿄증시에 재상장했다. JAL 개혁 당시에 공항 카운터 여직원이 그의 앞에서 월 2000엔(약 2만원)의 비용 삭감을 발표한 일화가 유명하다. 다른 임원들이 너무 적은 금액에 당황했는데 이나모리 회장은 크게 기뻐했다. 주인의식을 갖고 노력한 그 직원의 열정이 금액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게 그의 경영 철학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장기 집권 여당인 자민당이 아닌 야당을 줄곧 후원했다. “일본을 좋게 하려면 정권 교체가 가능한 나라여야 한다”는 게 소신이었다. 1990년대부터 야당 후원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2009년 민주당이 집권에 성공했지만 제대로 국정을 못하자 크게 낙담하기도 했다.

마지막 직함은 교세라 명예회장이자, KDDI의 특별고문과 JAL의 명예고문이다. KDDI의 다나카 다카시 회장은 이날 “‘인간으로서 무엇이 옳은가’를 묻는 그의 경영철학을 배운 건 KDDI에 둘도 없는 재산”이라고 말했다. JAL은 “탁월한 리더십으로 구조 개혁과 의식 개혁을 진행해 회사를 재생했다”며 “공헌과 공적에 감사드린다”고 발표했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창업하기 직전인 1958년 우장춘 박사의 넷째 딸인 아사코씨와 결혼해 딸 셋을 뒀다. 박지성이 2000년 일본 J리그의 교토퍼플상가에 진출했을 때 교세라가 축구팀의 메인 후원 기업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