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러시아 군사령부를 방문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의견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울에도 영상 10~20도 사이를 오가는 유럽의 ‘따뜻한 겨울’이 국제 정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럽행 천연가스 공급 중단으로 ‘에너지 대란’을 일으켜 서방을 분열시키려 했던 러시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겨울철 정전과 난방 중단 사태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우려했던 유럽 각국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천연가스 가격이 급락하고 인플레이션 압력도 낮아지면서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 여력은 더 커지는 한편, ‘에너지 무기화’에 실패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더욱 곤경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의 천연가스 가상거래소 TTF는 4일(현지시각) 올해 2월 인도분 천연가스 선물가격이 전날보다 무려 11%나 떨어진 1㎿h(메가와트시) 당 64.4유로에 거래됐다고 밝혔다. TTF의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유럽의 에너지 가격 지표로 널리 활용된다. 이는 정확히 1년 전인 지난해 1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 수준으로 돌아간 것으로, 지난 8월 26일의 1㎿h당 345.7유로와 비교하면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로이터 통신은 “예상을 뛰어넘는 유럽의 이상난동(異常暖冬)으로 인해 천연가스 수요가 줄어든데다, 미국과 중동으로부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이 본격화하며 공급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올 들어 스위스 서북부 쥐라의 최고 기온이 20도를 넘었고, 폴란드 바르샤바는 18.9도, 체코 자보르니크는 19.6도, 스페인 빌바오는 25.1도까지 치솟았다. 파리의 경우 1월 4일부터 15일까지 12일간 예보가 최고 기온은 7~14도, 최저 기온은 4~12도로 이른 초봄 같은 날씨를 보이면서 눈이 아닌 비만 내리고 있다. 프랑스 기상청은 “1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기온이 약간 떨어지겠으나, 낮 최고 기온은 계속 영상 10도 내외를 유지하다 1월 말에만 잠깐 영하의 날씨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고 예보했다. 스위스와 프랑스의 산간 지방에는 이로 인해 12월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스키장의 슬로프 절반이 문을 닫고, 저지대는 산악자전거 코스로 바뀌고 있다.

영국 BBC는 “따뜻한 겨울이 이어지는 이유는 유럽의 남서쪽, 즉 아프리카 서쪽 해안에서 불어온 따뜻한 공기층이 유럽 대륙으로 계속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유럽의 급격한 기후 변화 트렌드에 의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지난해 11월 보고서를 통해 “1991년부터 2021년까지 30년간 유럽 지역의 기온은 10년에 0.5도씩 상승, 세계 평균의 두 배를 웃돌았다”며 “유럽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빨리 기온이 오르는 지역”이라고 밝혔다.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스위스 레상의 한 스키장. 따뜻한 겨울 날씨로 인해 대부분의 눈이 녹아 사라진 상태다. /로이터

유럽 국가들은 덕분에 에너지 공급 부족으로 인한 ‘난방 대란’을 무사히 피해갈 수 있게 됐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분석에 따르면 현재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국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중단과 원자력 발전소의 가동 차질 등의 문제로 인해 에너지 공급량이 평년의 75~85% 수준으로 줄어든 상황이다. 이로 인해 올겨울 한파가 닥칠 경우 프랑스에서는 순환 정전 가능성이 제기됐고, 독일에서는 산업계를 중심으로 강제 에너지 절감책까지 나왔다. 유로뉴스는 “하지만 따뜻한 날씨 덕분에 에너지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다”며 “지난 8월 EU가 겨울철 에너지 대란을 막기 위해 제시한 에너지 15% 절감을 초과 달성한 국가들이 줄을 잇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러시아에 악재가 됐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 사회의 분열을 초래하기 위해 핵무기 위협과 천연가스 공급 중단, 곡물 수출 중단 등의 수단을 활용해 왔다. 그러나 핵무기 사용은 비현실적이고 곡물 수출은 다시 가로막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따뜻한 겨울까지 닥치면서 천연가스 공급 중단의 효과마저 사라지게 됐다. CNN은 “에너지 무기화를 통해 유럽의 우크라이나 개입을 막겠다는 러시아의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다”고 했다. 또 블룸버그 통신은 “올해 이상난동을 일으킨 기후변화의 최대 피해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라고 지적했다.

천연가스 가격과 더불어 국제 유가도 4일 미국 서부텍사스유(WTI) 기준 1배럴당 72.84달러까지 떨어졌다. 이로 인해 에너지 가격 급등이 견인했던 인플레이션 완화 기대감까지 높아지고 있다. 3일 발표된 독일의 1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년 전 대비 8.6%로 전달의 9.1%는 물론 전문가 예상치 10%보다 낮게 나왔다. 또 4일 발표된 프랑스의 12월 물가 상승률도 6.7%로 11월 9.1%보다 크게 떨어졌다. 블룸버그 통신은 4일 “인플레이션 완화가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프랑스와 영국, 독일 증시들이 사흘 연속 강세”라고 전했다.